기정진(奇正鎭) 1798(정조22)~1876(고종13)
조선의 학자. 자(字)는 대중(大中), 호(號)는 노사(蘆沙), 중추원사(中樞院使) 건(虔)의 후손. 전북 순창(淳昌) 출신. 8, 9세에 이미 경사(經史)에 통했고, 유학(儒學)에 전심하여 진사(進士)에 합격한 후 여러 번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다가 후에 벼슬이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다. 조선 유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서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이이(李珥)·이진상(李震相)·임성주(任聖周)와 함께 성리학(性理學)의 6대가로 일컬어진다.
기정진(奇正鎭)
시대 : 조선후기
국적 : 한국
생몰년 : 1798(정조 22)~1879
정의 : 조선 순조 때의 성리학자(性理學者).
생 애
자는 대중(大中)이고, 호는 노사(蘆沙)이며,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전북 순창(淳昌) 출신으로 5세에 『효경(孝經)』과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배웠고, 7세부터는 경서와 사서(四書) 및 제자서(諸子書)를 두루 읽었으며, 8세 때는 이미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리(性理)에 관한 문답에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0세 때에는 이미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비롯하여 경사백가서(經史百家書)에 통달하게 되어 신동이라고 불리었다.
이후 20여 년간은 성리학에 뜻을 두고 궁리와 사색에 몰두하였다.
그는 산사에 들어가 정좌하여 독서와 사색의 삼매경에 들기도 하였고, 때로는 월출산·두륜산 등 명산을 찾아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기도 하였다.
부친의 유언에 따라 31세에 향시에 응시하였고, 34세인 1831년(순조 31)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후에 강릉참봉을 시작으로 무장현감·사헌부 장령·군자감정·호조참의·공조참판·호조참판 등의 관직이 몇 차례에 걸쳐 제수되었으나 모두 간곡한 상소로 사의를 표했다.
관직에 나간 것은 45세 때 전설사 별제에 6일 동안 머무른 것이 고작이다.
사 상
그의 사상적 특징은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의 비판 근거가 되는 리일분수설(理一分殊說)에 관한 독자적 해석에서 나타난다.
그의 철학은 "리(理)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리일원론적(理一元論的) 세계관을 가진 그는 태극(太極)의 본연이 오상(五常)의 리(理)에 불과하고, 오상은 인간에 내재하고 오상의 내재는 곧 태극 본연의 내재라고 하여, 태극 본연이 인간에 내재한다면 인성(人性)을 초월하여 일원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분수를 떠나 일원이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였다.
인물성에 대한 동이(同異) 논쟁은 리일(理一)과 분수(分殊)를 분리시킴으로써 발생하는 것이라고 보아, 인성과 물성은 동이점을 동시에 가지며 동(同)과 이(異)는 모순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리일과 분수가 떨어질 수 없다고 하는 리기원융(理氣圓融)의 논리로서, 리와 기(氣)의 불리(不離)를 강조하는 리기일체관에 기초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리의 주재성(主宰性)을 강조하였다.
음양(陰陽)이 스스로 가고 그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천명(天命)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 것이며, 그 천명은 소이연(所以然)의 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리는 기의 존재와 생성·운동의 근거이며, 심지어 과(過)·불급(不及)의 악(惡)까지고 리에 근거를 둔다고 하였다.
기의 모든 현상적 작용이 리의 실현이므로 리기는 일체라는 그의 이론은 리일지리(理一之理)와 분수지리(分殊之理)가 대대(對待)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을 발판으로 하는 것이었다.
즉 리일지리에는 그 자체에 분수지리가 전제되어 있고, 분수지리에는 리일지리가 전제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리와 기 양자는 서로 필연적 전제로서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에 분리되지 않고 상함(相涵)한다고 하였다.
그의 리기론(理氣論)은 사승(師承)의 구애를 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전개되어, 기호학파(畿湖學派)에 속하면서도 다소 다른 점이 있었다.
이에 따라 전우(田愚)가 『외필변(猥筆辨)』·『납량사의변(納 私議辨)』을 지어 비판하는 등 그에 관한 논쟁이 확대되었다.
그는 리일분수의 논리를 사회 현실에까지 적용하려고 노력하였다.
말년에 접어들어 그는 외세의 침탈로 국가의 대외적 위기 의식이 높아지자, 내수외양론의 요체로서 군주의 도덕적 수양을 강조하고, 당시 군주 및 군주를 둘러싸고 정치를 농단한 집권층의 도덕적 타락을 극복하여 위기와 난국을 타개하려고 하였다.
평 가
임성주(任聖周)와 더불어 조선 후기 성리학파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그가 주제로 삼은 것은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리(理)의 능동성 문제·심시기(心是氣)에 관한 성정론(性情論) 등이었다.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이이(李珥)·이진상(李震相)·임성주(任聖周)와 함께 조선 성리학의 6대가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저 서
저서에『노사집(蘆沙集)』�『납량사의(納?私議)』�『외필(猥筆)』�『리통설(理通說)』 등이 있다.
기정진(奇正鎭)
24세. 1798~1879. 처음 이름은 금사(金賜), 자(字)는 대중(大中)이요 호(號)는 노령(蘆嶺)의 아래 하사(下沙)에서 살았으므로 노사(蘆沙)라 하였으며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이다.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된 재우(在祐)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덕언(德彦)의 딸이며 만연(晩衍)의 아버지이다.
어려서부터 자질(資質)이 영수(英秀)하고 움직임이 신중(愼重)함으로 일반의 존경을 받았다. 7~8세에 이미 경서(經書)를 읽고 사기(史記)에 능통하였으며 독학으로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1815년에 양친을 여의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전북 순창(淳昌)에서 장성 하남(河南)으로 이사하여 장성에서 몇 차례 집을 옮기며 살았다. 1828년 향시에 응시하고, 1831 신묘년(辛卯年)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명성이 조정에 알려져 1832년 강릉참봉(康陵參奉)이 주어졌고, 1835년에는 다시 현릉참봉(顯陵參奉)이 주어졌으며, 1837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사옹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의를 표하였다. 1842년에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로 임명되자 취임 6일 만에 병이났다 핑개대고 사임하여 귀향하였다. 얼마 뒤 다시 평안도도사, 1857년에 무장현감, 1861년에 사헌부장령, 1864년 사헌부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했고 후에 호조참판(戶曹參判)에 명배(命拜)하였으나 이것도 취임(就任)하지 않았다.
송대(宋代)의 철학자 주돈이(周敦燎), 장재(張載), 정이(程燎), 주희(朱熹) 등의 성리학을 독자적으로 연구함으로써 대성하였다. 유림계(儒林界)에서 성리학으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퇴계(退溪) 이황(李滉), 율곡(栗谷) 이이(李珥), 한주(寒州) 이진상(李震相),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등과 더불어 공(公)을 6대가(大家)로 칭(稱)한다.
그리고 선현(先賢) 학설에 이론을 말하는 학자는 사문란적(斯文亂賊)으로 몰았는데 공(公)은 전래(傳來)의 정주(程朱) 학설인 주리설(主理說)을 반복(反覆)하여 주기설(主氣說)을 주창(主唱)한 것이 유명한 기노사(奇蘆沙)의 외필(猥筆 ; 답문유취(答問類聚))이다. 이에 영남(嶺南) 유림(儒林)들은 일대반발을 일으키어 전국에 성토문(聲討文)을 돌리고 수백명이 창덕궁(昌德宮) 문앞에서 항소(抗疏)한 일까지 있었으나 40세 이후 공에게 경학을 공부하려는 선비들이 모여들었으며 노사의 학설을 호남에 뿌리 깊게 박혀 손자인 우만(宇萬)과 많은 제자들에게 전수되어 신진학자들은 위대한 학설로 숭배하여 오고 있다.
일화(逸話)로 공(公)이 9세 때에 책상을 보고 상위에 괴물(怪物)이 하나 있으니 바라보니 유절(有節)이요 어루만지니 무절(無節)이라 머리와 꼬리는 찬데 중심은 뜨겁다 하여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하였고 또 왕이 서울 사람 만명(萬名)의 안목(眼目)이 장성(長城)의 기모(奇某) 한사람 안목(眼目)만 못하다 한 것도 유명한 일이다.
면암(勉岩) 최익현(崔益鉉)이 공(公)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고 답문유취(答問類聚) 6권과 노사문집(蘆沙文集) 15권이 있으며 장성(長城) 고산사(高山祠)에 향사(享祠)하였다. [인물고(人物考) 등 여러문헌, 세보(世譜)]
기정진(奇正鎭) 자는 大中, 호는 蘆沙, 본관은 幸州
蘆沙集(奎6849), 奇正鎭(朝鮮)著.
22卷 目錄 2卷 合11冊 古活字本(木活字) 31.1×20cm.
四周單邊 半郭:22.9×14.9cm.
10行 1行 22字 注雙行.
版心:上下花紋魚尾.
蘆沙 奇正鎭(1798∼1876)의 詩文集이다. 序文, 跋文이 없어 刊記가 미상이다. 이 책은 初刊本으로 짐작되며, 後刊本으로 40권 20책에 그의 年譜·行狀·神道碑銘 등이 첨가되어 刊行된 것이 있다. 奇正鎭은 樞院事 虔의 후손으로 全北 淳昌에서 태어났다. 자는 大中, 호는 蘆沙, 본관은 幸州다. 8,9세에 이미 經史에 通했다고 한다. 儒學에 專心하여 進士에 合格한 후 여러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다가 후에 벼슬이 戶曹判書에 이르렀다. 조선조 儒學의 대가로 徐敬德, 李滉, 李珥, 任聖周, 李震相과 함께 성리학의 六大家로 불리워졌다. 第1책은 全篇이 目錄이다. 卷{1}:詩 147수(謹次立齋從叔淸音亭韻, 淸音亭 등). 卷{2}:詩 164수(次閔謙吾在南晦亭韻, 寄題雙壺亭 등). 卷{3}:疏 2편(丙寅疏 등), 附記로 策·狀 4편(壬戌擬策, 辭茂長縣監狀 등).「丙寅疏」란 1866年 프랑스함대가 침입해왔던 丙寅洋擾가 있은 후 그 대책으로 올린 상소문으로 6개조항({1}朝廷의 방침을 확고하게 세울 것, {2}외교상 辭令에 대의명분을 세울 것, {3}지형을 살펴서 外侵에 대처할 것, {4}鍊兵을 철저히 할 것, {5}衆論을 받아들여 쓸 것, {6}內修를 汲汲히 서둘러 할 것 등)을 들어 논했으며 그외의 上疏들도 時政의 폐해를 혁신하여 外賊에 대비할 것을 역설한 글이다. 「壬戌擬策」이란 1862년(哲宗 13) 猖?하는 民亂의 원인을 분석, 三政(田·軍·적)의 폐해에 起因하였다 하여 그 弊害를 바로 잡을 것을 力說한 글이다. 卷{4}:書 77편(上再從叔立齋書, 上再從兄允鎭, 與李星賢蓍成 등). 卷{5}:書 31편(與金東里照書, 答李穉固奎亨, 答權信元宇仁 등). 卷{6}:書 49편(答尹坡光宗儀書, 與趙光州徹永別紙, 答完山會所狀 등). 卷{7}:書 95편(答李羽瑞鳳燮, 與金景東在箕 등). 卷{8}:書 42편(答蘇君明弼基, 答趙直敎性家 등). 卷{9}:書 76편(答鄭周伯?, 答金章汝致熙 등). 卷{10}:書 96편(答曺士弘毅坤, 答柳德隣漢新 등). 卷{11}:書 89편(答崔元則琡民, 答吳重涵繼洙 등). 이상의 書에는 時事問候에 관한 것과 經傳의 성리학적인 문제와 禮에 관한 문제가 깊이 논의되고 있다. 卷{12}:雜著 34편(納凉私議, 理通說, 答人問, 偶記, 定策說, 猥筆, 形質氣質說贈鄭秀方, 蘆沙說, 愚氓說, 金龜城遺蹟敍, 石軒實紀敍, 玉岡遺蹟敍, 滄浪遺蹟敍 등). 雜著에는 字說이나 冊敍와 같은 雜文도 많이 있으나 納凉私議, 理通說, 答人問, 偶記, 定字說, 猥筆, 形質氣質說贈鄭秀方 등에서 성리학에 관하여 깊이 논하고 있으니 그의 理氣說은 주로 理一元論的인 說을 主張하고 있다. 卷{13}:序 40편(奇氏族譜序, 眉巖集序, 心經集解序, 忠孝錄序, 華山禮輯序, 山西雜錄序 등). 卷{14}:序 47편(鶴城世稿序, 白巖淨土寺事蹟序, 吳氏覆부集序 등). 卷{15}:序 35편(箕子誌重刊序, 槐下錄序, 愚打講會案序 등). 卷{16}:記 45편(光州文廟重修記, 竹坡書屋記 등). 卷{17}:記 30편(觀水亭重修記 등). 卷{18}:跋 67편(扶風七老會酬唱錄跋, 跋癸丑被譴錄 등). 卷{19}:箴 1편(李敎文書室箴), 辭 5편(梧潭辭寄鄭季國 등), 上樑文 4편(雲巖書院重修上樑文 등), 祝文 5편(告眩庵先生文, 告服齋先生文 등), 祭文 6편(祭靭齋尹公五榮文 등). 卷{20}:碑文 4편(耽津崔氏始祖墓碑, 光陽縣平賊碑 등), 墓碣銘 9편(壬辰義士韓公墓碣銘 등), 墓誌銘 6편(懼而軒翁墓誌銘, ?孫墓誌銘 등). 卷{21}:墓表 30편(石底阡表 등). 卷{22}:行狀 9편(曾祖考府君行錄 등), 傳 2편(東里處士金公傳 등), 遺事 1편(宣敎郞軍資監參奉朴公遺事) 등. 이 책은 儒學史上 뺄 수 없는 重要한 典籍일 뿐만 아니라 朝鮮朝 末期의 人物·時政을 살펴 보는 데도 많은 자료를 제공해 줄 것이다.
高山書院誌
古 370.9-G27
呂昌鉉 등 편, 1968년.
4권 1책, 석판본, 27.6 18.6cm
全羅道 長城에 있는 高山書院의 書院誌다. 高山書院은 조선후기의 儒臣 蘆沙 奇正鎭(1798∼1879)과 그의 門下 六賢인 月皐 趙性家(1824∼1904), 石田 李最善(1827∼1885), 莘湖 金祿休(1827∼1899), 東塢 曺毅坤(1832∼1893), 老柏軒 鄭載圭(1843∼1911), 松沙 奇宇萬(1846∼1916) 등을 配享한 書院이다. 기정진의 후학들이 奇正鎭이 晩年에 燕居하면서 藏修講學하던 澹對軒을 1924년에 重建한 후 1927년에 高山書院을 세웠다. {권2}에는 [高山書院 位置圖]를 비롯한 각종 圖類와 上樑文, 奉安文, 儀節, 院規 등이 실려 있다. {권2}에는 奇正鎭 및 門下六賢의 神道碑銘, 行狀, 澹對軒記 등이 실려 있다. {권3}에는 [配享時本院發文]과 [列郡通文], [院任錄], [祭官錄] 등이 실려 있는데 모두 1920년대의 것이다. {권4}에는 [扶成錄]과 [高景錄] 등이 실려 있는데 모두 일제 강점기 이후 1950년대까지의 기록들이다. (연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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