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나의 뿌리

추봉선생자료 하나

여경(汝梗) 2008. 2. 3. 23:33

합천 추용만(秋鏞滿), 추용소(秋鏞韶)의 3.1운동시위


  경상남도 합천군 대양면 무곡(茂谷)마을 출신 추용만, 추용소 두분은 3.1운동 당시 순국한 분들이다. 아래에 당시의 상황을 기술한 논문을 요약한다.

  현재 합천 무곡(상무)마을에는 추씨의 정각인 퇴산정(退山亭)이 있다. 또한 경자보의 서문을 주신 의령남씨(宜春)추봉(秋峯)남승우(南勝愚)선생이 학문 강도하던 암첩제(巖捷齋), 암서정이 소재하고 있으며, 추계추씨 집성촌(현재에는 6호 정도 거주)이 있다. 무실 추계추씨의 입향조는 추씨 16세 만소(晩紹)이시며 무실종친회장은 추태식(대종회 고문), 부회장에 추연우, 총무에 추연상, 고문에 추상호, 추광호씨가 선출되었음이 2002년 5월 대종회보의 지방종친회소식 난에 소개되었다.


 <합천·대양 3.1운동 시위의 개요>


  합천·대양 시위는 대양면민이 중심이 되어 1919년 3월 19· 20 및 22일까지 합천읍내에서 전개한 3.1운동 시위이다.합천면은 군소재지로 합천군 동서와 남북 교통이 교차하는 곳이어서 교통이 편리하고 물자의 집산지이다. 이곳에는 동족부락이 10곳 있고 그중 6곳이 합천 이씨의 동족부락이다. 영창리(盈倉里)에는 면우(宇) 곽종석(郭鍾錫) 문하 고족(高足) 희당(希堂) 김수(金銖)가 강학하던 창계서당(滄溪書堂)이 있다. 대양면은 황강을 사이에 두고 합천면 남쪽에 있으며 이곳에 있는 10곳의 동족부락 중 진양 강씨 곳이 4곳, 청송 심씨 곳이 3곳인데 이 두 성씨의 동족부락은 100세대 이상을 이루는 큰 것이다. 이곳에 있는 추모·강학을 위한 정(亭)·재(齋) 등의 기문(記文) 또는 양송(樑頌)의 찬자(撰者)를 살펴보면,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문인인 노백헌(老柏軒) 정재규(鄭載圭)(6), 시암(是庵) 이직현(李直鉉)(6), 율계(栗溪) 정기(鄭琦)(3), 의춘(宜春) 남승우(南勝愚)(10) 등이 찬(撰)한 것이 25곳이나 되어 한주학파(寒洲學派)의 면우 곽종석(郭鍾錫)·중재(重齋) 김 황(金榥)·희당(希堂) 김 수(金銖)·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등이 찬(撰)한 곳이 6곳인데 비하여 볼 때 이곳 유림의 학풍은 노사(蘆沙) 계통의 것이 아니었나 추측해 본다. 특히 무곡리(茂谷里)에는 시암(是庵) 이직현(李直鉉)에게서 배우고 시암(是庵)의 손녀를 부인으로 맞은 추봉(秋峯) 남승우(南勝愚)가 강학하던 암첩재(巖捷齋)가 있고, 노사(蘆沙)와 한주(寒洲) 문인 고족(高足)이 찬기(撰記) 또는 찬양송(撰樑頌)한 재(齋)가 7곳이나 되는 것으로 보아 특히 유림이 성했던 곳으로 보인다.
  대양면 시위는 이곳 무곡리(茂谷里) 출신의 강홍렬(姜弘烈)이 유학자인 부친과 함께 인산에 참여차 상경하였다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서 합천지역에 전파하였다고 한다. 강홍렬(姜弘烈)은 당시 24세의 청년으로 한학을 배워 대병면에서 서당 훈장을 하고 있었다 하는데, 이곳의 시위는 그의 배후 주도하에 합천면의 주경천(朱擎天)과 대양면 대목리(大目里) 심재기(沈載祺)·심진환(沈瑨煥)·심재인(沈載仁) 등 12동지가 대목리(大目里) 이계(伊溪)에 있는 수암정(修巖亭)에서 밀의를 거듭한 후 3월 19일 합천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를 했다.
  1919년 3월 19일 주도인물들은 준비된 태극기를 갖고 합천읍으로 잠입하여 오후 4시경 장꾼들이 가장 많이 모여들었을 때 장 복판에서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이에 약 500명의 장꾼이 호응하여 만세를 부르며 시위대열을 지어 시장거리를 누볐다. 이때 일경 19명이 출동하여 심재기 외 16명을 붙잡고 나머지 군중은 해산되었다.
  이튿날인 3월 20일 대양면민 2-300명은 다시 대목리(大目里) 앞 마정(馬亭)부락에 모였다. 대목리(大目里)의 심맹권(沈孟權)(22, 일명 재현(載現))이 이때 군중의 앞에 나서, 소기의 목전을 달성하기 위해 결사대를 조직하자고 제의하여 그를 포함하여 손득룡(孫得龍)(24, 일명 용이(龍伊) :대목리(大目里) 음식점), 이용선(李龍善)(38, 무곡리), 김영기(金永騏)(48), 추용만(秋鏞滿)(32), 이상자(李相字), 배상룡(裵祥龍)(28) 등 12명이 나서 결사대를 조직하고 명부를 작성하여 이름을 적고 각각 무인을 눌러 소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 헌신할 것을 서약하였다. 시위대는 결사대를 앞세우고 6km 떨어진 합천읍내로 들어가 각 면에서 모인 군중과 합세했다. 김영기(金永騏)는, "나라 잃은 백성은 사람 아닌 닭과 개"같음을 역설하고, "조국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1인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읍내 거리를 시위한 후 오후 7시경 시위대는 합천경찰서로 쇄도하여 전날 구금한 심재기 등 17명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때 합천경찰서 안에는 경찰서장 식촌현후(植村玄厚)와 순사 1명, 순사보 4명이 소방부 6명, 주민 2명의 지원을 받아 있었는데, 서장은 고압적 자세로 해산을 명하고 소방부와 더불어 시위대를 밀어내려고 하였다. 이에 시위군중은 깃대를 가지고 순사를 때리고 소방부와 맞붙는가 하면 담을 넘어 서내로 돌진하려 하였다. 일경이 공포를 쏘아 위협하였으나 군중은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더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이때 진촌희삼랑(津村喜三郎)·대구보희구삼(大久保喜久三)·약본작차(掠本作次) 3명이 엽총을 발포하여 4명이 즉사하고 11명이 부상을 입었다. 일제의 기록에는 이틀 후인 3월 22일에도 경찰서 습격이 있었다고 하고 있다. 시위로 하여 순국·부상·수형자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순국자 : 김영기(金永騏)(48)
추용만(秋鏞滿)(32)
추용소(秋鏞韶)(32)
김호수(金浩洙)(32 : 일명 호준(浩俊))
② 부상자 : 이용선(李龍善)(38 : 무곡리, 농)
손덕룡(孫德龍)(24 : 이명 용이(龍伊), 대목리, 음식점)
심재수(沈載洙)(대목리) 외 8명
③ 수형자 : 심맹권(沈孟權)(25 : 이명 재현(載現), 대목리, 농), 2년
배상기(裵祥祺)(28)
이용수(李龍守)
이용선(李龍善)(38 : 무곡리, 농), 2년
손득룡(孫得龍), 2년
강상무(姜相武), 1년


※추용만(秋鏞滿)(1887∼1919) :당시 32세, 자(字) 경삼(景三), 호(號) 청암(淸庵), 12인 결사대의 1인, 3월 20일 시위에서 태극기를 매단 죽간(竹竿)으로 경찰서장의 머리를 후려갈기고 경찰서로 돌진하다 일경의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자료출처-경남 합천의 3·1운동(이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