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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를 일본것으로 기만해왔다.(코벨박사) 

여경(汝梗) 2006. 3. 1. 08:32

한국문화를 일본것으로 기만해왔다는

    사실을 폭로한   외국학자 코벨 박사     

 


일본이 오래 전부터 한국문화의 산물을 일본 국적의 것으로 기만하고 역사를 왜곡

 

해온 사실을 폭로한 서양 학자가 있습니다.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1912~96) 박사가 그 주인공 입니다.


컬럼비아대에서 일본미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백인 최초의 일본학

 

박사이기도 합니다.


그는 일본문화를 연구하다가 그 근원인 한국문화에 심취해 깊이 있는 연구활동을

 

벌였습니다.

 

미국 태생의 동양 미술 사학자인 그는 중국,동남아,유럽뿐만 아니라, 일본 문화에

 

대한 전문가로 특히 일본에 대한 많은 자작을 남겼습니다.

 

일본 미술사에 심취했던 그는 일본문화의 심연속에서 끊임없이 어른대는 한국

 

문화에 대한 정체성에 의문을 가집니다.

 

그는 곳곳에서 일본인들이 어떻게 역사와 문화사를 왜곡하고 있는지 날카롭게

 

지적하고 학자로서의 양식을 보여주면서 많은 이들에게 진실이 무엇인지 확인

 

하게 해주는 모습을 보입니다.



(14세기 일본 大화가 80%는 한국인 )

역사왜곡이 문제입니다.

 

왜 모든 사람이 일본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데 대해 그처럼 치를 떠는가요?

 

일본은 과거 500년이 넘게 역사를 왜곡해왔고, 대부분의 사람이 이를 그대로 받아

 

들입니다.

 

하지만 내가 공부한 한국의 고대사와 고고학에 따르면 바로 한국인들이 고대의

 

지도자들이었으며 당시 중국인에게 난쟁이들, 혹은 왜구로 알려진 지금의 일본인

 

이야말로 선진문명을 감지덕지 받아들인 수혜자임을 확신케 하는 것입니다.


일본은 ‘난쟁이’ ‘왜구’ 같은 단어를 아주 싫어해 7세기부터 이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사실상 왜.인들은 오직 백제사신들을 통해서만 선진문물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증명하는 좋은 자료가 전 주일 미국대사 에드윈 라이샤워가 번역한 ‘옌닌(圓仁)

 

의 일기-입당구법(入唐求法) 순례행기’입니다.

 

승려 옌닌은 “한국인 해상왕 장보고의 통치 아래 있던 중국 내 한국의 식민지 신라방

 

자신에게 베풀어준 배려가 아니었다면 중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

 

이라고 썼습니다.

 

불교도인 옌닌 일행이 방문한 840년경 중국은 불교를 탄압하고 있었습니다.

 

옌닌 일행은 중국인에게 뇌물을 주고 한국인에게도 선물을 주어 중국으로부터 벗어나

 

금강경을 일본에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모든 배편은 한국을 경유했으며 배도 모두 한국 배였습니다.


오늘날 일본이 저지르는 역사왜곡의 맥락에서라면 머잖아 히데요시의 군사들이 한국인

 

도공을 ‘초청’해다가 ‘일본에 파견근무’케 하고 이들에게 ‘무료 교통편과 숙식을 제공’

 

하여 ‘그들이 기술을 이곳에 전파했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당시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5~6세기에 한국인들이 일본에 전한 스에키 토기 수준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사이 1000여 년 동안 일본 도공들은 한반도에서 온 도자기 기본을 따라 도자기를

 

만들어왔는데 16세기에 들어 그들은 조선 도자기산업의 새 피를 수혈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새 피의 수혈은 뛰어난 기술혁신을 가져다 준 것이기에 이후 일본의 도자기는 한국적

 

착상에 힘입어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한국 점령이 자랑거리?)

1923년 도쿄와 요코하마를 덮친 관동대지진 때 한국인은 인명과 재산피해로 광포해진

 

일본인들의 희생양이 되어 타격을 받았습니다

.

교과서가 씌어진 1930년대에는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빈곤지역을 ‘마늘 먹는 조선인’

 

들이 사는 곳이라 부르며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지역으로 몰아갔습니다.


미국 정부는 2차대전 당시 광분한 미국인으로부터 재미일본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일정 지역에 피난시킨 루즈벨트 대통령의 조치를 교과서에 수록하도록 요구

 

할지도 모릅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오늘(1982년)에 와서 일본 자본가들은 그때 잃은 땅과

 

사업을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배상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이 같은 조치를 한국인들에게 취했는가요?


아닙니다.

 

일본인들은 과거 한국에 해악을 끼친 사실에 대해 치욕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시건방진 자랑거리로 여기며 수십년 전과 달라진 바 없는 차별과 왜곡을

 

일삼고 있습니다.

 

일본 군부는 2차대전에서 아무 교훈도 못 얻었단 말인가. 겉보기에 그들은 분명히

 

반성의 기색이 없습니다.

그런데 일본문화사에서 한국의 영향을 모두 제거한다면 남아나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적어도 서기전 3세기부터 8세기까지는 그러합니다.

 

순수한 일본 고유 문화가 이룩됐다고 하는 10세기에 와서도 일본 대궐에서 벌어지는

 

가장 신나는 일 중의 하나는 대궐 사람들 중 누가 제일 한국춤을 잘 추는지 가려 뽑는

 

행사였습니다.

일본이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14세기 새로운 수묵화의 기법은 사실 조선에서 먼저

 

생겨난 것입니다.

 

일본의 수묵화를 그린 화가들 중에 조선 출신의 수묵화가이던 선승(禪僧)들을 다 추려

 

낸다면 일본이 뽐낼 만한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적어도 일본이 내세우는 14세기 수묵화 대가의 80%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입니다.

16세기에 들어와서도 조선에서 유입된 사상과 노동력이 일본의 예술을 발전시킨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일본은 한국을 강제합방해 한국인을 노예로 부려먹었습니다.

 

또 있습니다.

 

정확히 언제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왜구의 노략질이 고려시대에는 특히 심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역사왜곡까지 새롭게 시도해서 한국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일본의 이런 압력에 굴복하거나 모욕을 한 귀로 흘려넘기는 한, 일본은

 

소리 없이 등뒤로 다가와 한국을 밟고 설 것입니다.

역사왜곡은 712년부터 이어졌습니다.


일본인이 쓴 글에는 한일관계를 거짓으로 기록한 것이 아주 많은데, 한국인들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입니다.

 

히틀러는 “거짓말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은 잘 믿는다.

 

거짓말이라도 자꾸 되풀이하면 머잖아 많은 사람이 진실로 받아들인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왜곡은 1300여 년 전 씌어진 첫 일본 역사책에서 일어났습니다.

 

당시 나라(奈良)의 왜(倭) 지배자들은 일단의 학자들에게 사서 편찬을 의뢰했습니다.

 

편찬 목적은 당대의 일왕들이 정통성을 가진 지배자임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일본 역사가들은 369년 가야 부여족의 왜 정벌 이래 700년까지 한국이 정치·문화적

 

으로 일본을 전적으로 지배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감춰버렸습니다.

 

히틀러가 말한 것처럼, 거짓말은 클수록 사람들을 속이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일본 사가들은 역사를 뒤집고 가야에서 온 부여족이 왜를 정복한 게

 

아니라 왜가 가야를 정복했다고 썼습니다.

‘일본에서 와 가야와 신라를 정복했다’고 알려진 유명한 신공(神功)왕후는 사실은

 

선단을 이끌고 왜를 침략해 정벌한 강인한 의지의 한국왕녀였습니다.

 

369년의 오진왕부터 게이타이왕 이전까지(또는 일본역사에 등장하는 15대 천황부터

 

25대까지)는 전혀 일본인이 아닌, 순수 한국인 혈통의 왜왕이었습니다.

일본 건국자로 알려진 초대 일왕 진무는 4세기 부여인들이 일본을 정벌한 사실을

 

반영할 뿐입니다.

 

해의 여신인 천조대신(天照大臣)은 무당이며, 그녀의 오빠 스사노오노 미코도(素尊)는

 

신라인입니다.

 

그러나 8세기 역사가들은 이 두 인물에게 일본옷을 입혔습니다.

 

20세기에 와서 이들의 정체가 드러나기까지, 역사가들은 사람들을 속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입니다.

나이 든 부모를 버리는 불효자식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두 세대 전 한국인들에게 한국문화는 열등한 것이라며 일본말과 일본 이름,

 

일본식 제도를 따라야 한다고 강권했습니다.

 

한국의 수많은 서책이 불에 타 없어지고 예술 활동도 금지됐습니다.

 

숱한 보물이 나라 밖으로 실려 나갔습니다.

 

석굴암을 해체해 돌 하나하나를 일본으로 옮기려고까지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일본은 거짓말과 날조를 통해 한국인에 대한 문화적 대량학살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일본이 초기 역사부터 8세기에 이르도록 한국이 떠주는 음식을 받아

 

먹고 자란 어린아이였다는 것입니다.

정말 배은망덕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제 한일강제합방이 ‘한국을 위한 선택’이었으며, ‘한국인들이 원한 일’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역사를 재구성하려 합니다.

일본이 일으킨 (1982년) 교과서 파동은 첫 단계에 불과합니다.

 

다음 단계는 일본 헌법의 전쟁 금지조항을 삭제하고, 셋째 단계에 가서는 천황가를

 

‘성스러운 권력체’로 되살린다는 게 일본의 속셈입니다. 이것이 실현 가능할까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후 집권여당이 된 자민당은 그 이름과는 동떨어지게

 

보수성과 상업성을 추구하는 정당으로 군림했습니다.

 

이제 자민당은 상징적인 존재인 일왕을 실제적인 국가원수로 키우고 싶어합니다.


(일본인은 솔직해질 수 없다)



1980년 나는 유네스코 강당에서 3대의 영사기로 컬러 슬라이드를 비춰가며 한국·

 

중국·일본의 예술형태를 통해 극동의 세 나라를 비교하는 강연을 했습니다.

 

세 나라의 특성을 한마디로 요약할 말을 찾다가 영어의 C자로 시작하는 낱말을

 

떠올렸습니다.

 

중국은 통제(Control), 한국은 무심함(Casual), 일본은 작의적(Contrived)이라고.

 

이런 대비는 삼국의 도자기를 비교해보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중국 도자기는 가마와 유약의 사용을 철저하게 관리한 결과 특히 도자기에서 완벽의

 

경지를 이뤄냈습니다.

한국의 도공은 언제나 자연스럽기 짝이 없고 무심해서, 이들이 만들어낸 도자기에는

 

도공의 기질과 불이 어떻게 작용했는지가 그대로 반영됩니다.

일본인들은 15세기 이도다완 전쟁에서 보듯, 이러한 한국적 무심함을 높이 취해서

 

과도하게 발전시킨 나머지, 그들의 도자기는 자의식이 담긴 작의적인 것이 됐습니다.

 

일본인들은 가마에서 구워낸 화병의 한 귀를 일부러 구부리거나 깨버림으로써 한국

 

도자기가 갖는 것 같은 ‘무심함’의 미를 주려고 합니다.

미국인이 보기에 한국 도자기의 이런 무심함은 솔직함과 통합니다.

 

내가 일본의 교토보다 서울에서 더 편히 지내는 이유는 지극한 미소로 일관하는 교토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솔직한 서울사람들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10여 년 동안 매년 여름과 겨울을 교토 대덕사(大德寺)의 유명한 선사찰 진주암

 

에서 보냈는데, 그 무렵 나는 주지스님과 삶에 있어 ‘솔직함’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자주 다투곤 했습니다.

 

면전에서 하는 말과 등뒤에서 하는 말이 다른 일본인의 이중성에 대해 지적하면 그는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 정당화하곤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호벤(方便)’, 즉 편의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솔직함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자기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일본인들은 어떤 상황이라도 거기에 맞는

 

표정을 지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진짜로 느끼는 감정은 속에서 억제되고 대신 ‘작의적 얼굴’로 외부에 알려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