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나의 뿌리

조부 추봉선생

여경(汝梗) 2008. 12. 1. 16:14

조부님의 휘는 승우(勝祐) 의령 남씨 25세손 이며
호는 추봉(秋峰)
字는 敬眞
고종황제때인 壬辰년생 1892년
甲辰 2월 25일 별세 1964 (양력 1964 4. 7)
조모님은 강양이씨 부 원칠
임진생이며 12월 9일 돌아가심
묘 무곡리 장자동 뒷산 계좌 쌍봉

내가 세살때 조부님 회갑연이 있었으며 이때의 사진



젊었을때는 전국을 유람하셨다고 하나
내가 어릴적에는 이미 회갑을 넘겼으니 유람 보다는
공부하는일과 한약제를 모아 한약을 조제 하시었고
밤에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셨다
조부님이 거처하시던 서당이 암서정 혹은 추봉서실이라고 하며 아직도 보존되고 있다



나도 중학교에 입학할때까지 한문공부를 했는데
명심보감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지금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한문실력이 그때 실력인거 같다

아뭏든 벼슬을 멀리하고
순수한 학문을 하시다가 가시었고
많은 문집을 남기셨다

조부님의 문집은
대한민국 국가전자도서관에 등록이 되어있다

[국가전자도서관바로가기 검색창에 남승우 라고 입력하세요]

다음은 묘비에 있는 글이다
이글은 친구이며 사돈지간인 추연(權龍鉉)선생께서 쓰시었다

秋峯南君墓碣銘(추봉남군묘갈명)
가신 벗 추봉처사 남경진(南敬眞)이 중원갑진에 병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시니
그가 태어난 것이 고종 임진이라 73년을 산 셈이다.
부고가 나가니 원근에서 추봉을 아는 이 모르는 이 모두다
우리 사문(斯門)이 더욱 외롭게 되었다고 탄식하였다.

장사를 치르고 그 절친한 벗들이 또한 뒷일을 의논하여 서로 돈을 내어 남긴 글을 발간하였고,
그 후 아들이 또한 장자동 뒷산 계좌원(癸坐原)에 묘를 이장하고 비(碑) 세울 것을 꾀하여
그의 동학(同學) 친구인 이임헌(李任軒)에게 행장을 받아 나에게 비문을 부탁하였다.

슬프다.
나와 추봉은 머리를 묶어 서로 사귀어 마음을 맡긴 지 50여년인데
늘그막에는 마치 귀뚜라미와 쓰르라미 같았거늘
이제 갑자기 잃어버렸으니 옛 사람이 거문고 줄이 끊어지고 바탕을 잃었다는 말을 매번 외우며
스스로 슬피 상심하였으니 또한 어찌 감당할 수 있으리오.

군(君)의 휘(諱)는 승우(勝愚)니 의령남씨 가운데 선대에 이름을 드러낸 분이 많았고
중세에 추계 진(振)이 계셔 족부 추강선생을 스승으로 모시다가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식솔들을 이끌고 남쪽 삼가로 숨었으니
이로부터 삼가인이 되었고 대대로 선비의 몸가짐을 가지고자 하였다.

증조는 호(號)가 락헌(樂軒) 휘(諱)는 한모(漢模)이며
조부는 호가 반고(盤臯) 휘는 영희(永熙)요,
부친은 호가 묵와(嘿窩) 휘가 상봉(相鳳)이며 모친은 초계 정씨 삼규(三圭)의 따님이다.

군(君)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었으며
열 네살 나이에 이시암선생이 추봉을 보고 사랑하여 손녀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이로부터 처가에 머물며 배우기를 수년에 뜻이 견고하고 아는 것이 정확하여
나이 이십 무렵에는 친구들 가운데에서도 뛰어났고 재주가 날로 알려졌다.

당시 새로운 학문의 흐름이 더욱 격심하여 평소 뜻이 곧다고 하는 사람들도 대개가 휩싸이고 물들었으나
그대는 홀로 의연히 목숨을 걸고 바른 道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 악부(握符)를 쥔 듯하였고
각고의 노력으로 경전과 예(禮)를 스스로 매진하고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정밀하게 아는 것으로
그 오묘함을 깊이 찾으며 점점 향상되어갔다.

일찍이 이르길 천하의 이치를 내 마음으로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고
인하여 제가(諸家)를 섭렵하고 천문, 운명, 의술, 점, 도술 등 모두를 또한 그 방법을 찾아 이치를 터득하였다.
시와 문장을 나타냄 또한 고인을 힘써 좇아 그에 미쳤으니
일찍이 남송사를 읽고 그 충의의 자취를 시로 읊어 음운이 비장한 곳이 많으니
대개 시대에 맞지 않은 감회를 부쳐 자신을 힘쓰게 한 뜻이었다.
매번 아름다운 산수에 놀기를 좋아하여 지리산, 가야산, 금산 봉우리에 두루 올라 회포를 풀었고
북으로 요동벌판에 이르러 관유안(管幼安)의 풍도를 생각하고 삼학사의 의리를 조문하니
그 근심과 분함의 마음을 볼 것이다.

군(君)이 중세에 합천 태암산 아래 옮겨 살면서 처음에 장곡에 가산정을 지었다가
늘그막에는 무곡에 암서정이라고 편액하였으니 대개 숨어 수양하며 생애를 마침에 뜻을 둔 것이다.
이때에 배움을 청하고 글을 구하는 자 암서정에 끊이질 않았는데 엄연히 한 지방의 본보기가 되어 따르는 바 되었다가
문득 병으로 돌아가셨으니 어찌 탄식하며 슬퍼하지 않으리오.

군(君)은 기운이 부드럽고 안색이 온화하여 마음과 몸에 간교한 생각이 전혀 없으며
사람들과 사귐에 진실하여 모나거나 우쭐하는 것이 없어서 어진 이 어리석은 이 모두가 그를 좋아하였다.
무릇 선대를 이어가고 집안을 돈독히 함에도 부지런하고 정성을 다하여
이전에 겨를을 내지 못하였던 일들을 많이 기다려서 이루되 일치하지 않음이 없었다.
지론은 항상 평탄하여 교만, 과격하거나 사사로이 치우치지 않았으며
그 지키는 바가 확실함에 이르러서는 가히 의롭지 않은 것에 흔들림이 없었으니
어찌 이른바 부드럽고 아름다움을 법도로 삼아 사람들과 화합하면서 세상에 흐르지 않는 자 아니리오.

부인 이씨의 본관은 강양이요. 부친은 원칠이니 부인은 군(君)보다 4년 뒤에 돌아가셨고 묘는 쌍분이다.
두 아들은 기훈, 기종이고 두 딸은 최효준과 권순표에게 출가하였으며 내외손 약간명이 있다.

비석에 새겨 가로되
슬프다 추봉이여! 많은 재능을 겸비하였으니
한 재주에 국한됨을 부끄러워하였고,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배우고 닦았으니
적게 이루는 것에 만족하지 아니 하였네.
세상과 다름을 어찌 근심하리오.
천고를 거역하고 함께 자취하였으니 노년이 되어 무엇을 구하랴.
밝은 단충(丹衷)의 마음 내후에 회복되리.
고인의 비명(碑銘)이라 아첨코자 함이 아니오.
오직 그 뜻을 여기에 드러내 보이니
귀신에게 묻고 오는 자 읽어보기 바란다.


화산 권용현

 

 

 

 

출처-사촌오빠 홈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