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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문화의 효시-꼭두쇠 바우덕이

여경(汝梗) 2006. 4. 17. 19:46

 

 

우리나라의 현대적 대중문화의 효시는 누구일까? 라는 자문이 일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많은 이들이 서구문화로부터 우리 대중문화예술의 원류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현재의 대중문화예술은 서구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민중예술을 통해서 발전해온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 대중문화의 원류를 찾는 중심점에는 항상 사당패가 자리잡는다. 그리고 바우덕이라는 유일무이한 여자 꼭두쇠가 사당패를 대표한다.

즉 바우덕이는 우리나라의 대중문화를 개척한 인물로서 연예의 효시가 되는 것이다.

 

조선 후기 신재효에 의하여 재정립된 판소리는 우리 음악의 중요한 부분이었으나 민중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였다. 연예로 발전시킬 수 있는 개성 있는 인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판소리 연희 자체의 형식과 참여에 있어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외에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전승된 궁중음악인 아악이 있지만 종묘제례에 쓰이는 것일 뿐 대중문화와 연관을 지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당패 중에서도 안성남사당패에는 바우덕이라는 특별한 영혼과 능력을 갖춘 개성 있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탁월한 능력으로 경복궁 중건에 동원되어 사기가 떨어진 많은 공역자들과 백성들에게 신명의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렇게 하여 엄청난 규모의 경복궁 중건사업은 잘 마무리될 수 있었다. 아마 바우덕이가 없었다면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도에 포기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바우덕이가 공연을 할 때는 얼마나 신명이 났던지 공역자들은 등짐에 짐도 지지 않고 분주히 뛰어다니며 '얼쑤 얼쑤' 흥을 어우르기만 했다는 일화로 미루어 볼 때 당시의 감흥과 신명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당시의 이 사건은 매우 큰 충격이었다. 민중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대중이라는 개념도 없었던 시기에, 대중문화 특히 연예의 힘인 스타가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공로에 보답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바우덕이가 이끈 천민 집단인 안성남사당패에 당상관 정삼품의 벼슬을 내려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안성남사당패 영기(令旗)에 걸어준 옥관자였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유랑 천민집단이 당상관의 고관 벼슬을 받은 것도 그러려니와 일개 놀이패에 벼슬을 내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정삼품을 받은 사당패 깃발을 앞세우고 가면 전국의 모든 사당패가 절을 드렸다(만장기를 숙여서 예의를 표시함-旗拜)고 하는데 당상관에 대한 예우의 사정을 미루어 볼 때 이 또한 사실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전국 공연단체 중에서 대장 역할을 담당한 바우덕이가 이끄는 안성 남사당패는 전국 어디에서건 공연이 가능한 최초의 전국구 공연단체가 되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또한 이 때부터 바우덕이가 이끌던 안성남사당패는 "바우덕이"라는 인물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바우덕이가 왔다" "바우덕이다"로 불렸다고 하는데 이러한 이름의 대중화는 우리나라 문화에는 없었던 현상이었다. 바우덕이의 천부적인 예술적 능력과 스타 기질이 이러한 유행어를 파생시킨 것이다. 대중예술의 특징,특히 연예의 특징은 스타가 있다는 것이다. 스타는 이름으로 불린다. 스타는 관중을 몰고 다닌다. 스타는 관중과 대중을 실망시키는 일이 없다. 바우덕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스타로서 인정을 받는다. "남사당패"가 왔다가 아니라 "바우덕이"가 왔다는 그 시점이 바로 우리나라 연예가 시작된 것이며 민중에게 사랑과 동경의 대상이 형성된 일대 사건이라 할 것이다.

 

[연혁]

1848 안성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출생

1853 안성 서운면 청룡사 안성남사당 입단 (당시 5세) -선소리, 줄타기, 풍물, 무동, 새미의 모든 남사당 공연예술 학습

1863 안성남사당 꼭두쇠 추대 (당시 15세) 남사당에서 최초이자 최후의 여성 꼭두쇠로 활동 시작 (당시 꼭두쇠 였던 윤치덕의 사망 후 바우덕이가 꼭두쇠로 추대됨)

1865 고종 2년 경복궁 중건에 안성남사당패를 이끌고 출연 최고의 영예인 정3품 당상관 벼슬 상당의 옥관자 수상 남사당을 전국 예술집단의 최고봉으로 끌어 올림

1865~1870 안성남사당패가 “바우덕이”로 통칭됨 전국을 다니며 공연활동을 펼침 → 대한민국 연예문화 탄생 → 최초의 연예인 : 남사당 바우덕이

1870 폐병으로 사망 (남사당 단원의 간호를 받다가 사망함) 남사당 단원들이 바우덕이를 청룡리 골짜기에 안치하고 장례를 지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