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이바구들/사람되는 이바구

보시하는 삶, 김장하선생님-형평운동기념사업회 어느 해 이사회에서.

여경(汝梗) 2017. 2. 17. 09:54

김장하선생님 말씀 녹취

 

[진정한 보시의 삶]

 

반갑습니다. 이사회가 좀 딱딱하다 해서 이야기가 있는 좀 재미있는 모임을 해보자 해서 이렇게 제가 시작하게 된 것 같습니다.

오늘 주제는 ‘보시’로 하겠습니다. 보시라 하면 베풀보자 베풀시자로, 우리 말로 하면 ‘베품’입니다. 그런데 베품이나 보시나 같은 말인가 하고 검색해 봤는데 뉘앙스가 좀 다르더라구요. 지난번 홍세화씨가 강연을 왔을 때, ‘분배와 나눔’이란 이야기를 했었거든요. 분배가 나눔이고 나눔이 분배인데 왜 뉘앙스가 다르냐? 분배는 약간 강제성을 띤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나눔은 그저 나눔이더라~ 그런 말씀을 생각하면서, 오늘 보시와 베품에 대해서는, 보시는 불교에서 많이 써왔습니다. 우리가 기복신앙에 젖어들면서 보시라는 말을 쓰면서 항상 뭔가 복을 받아야 할 것 같은 반대급부적인 어떤 어원이 담겨있는 것 같은 이런 생각이 들고, 베품이라면 그냥 베푸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는데, 불가에서 보시란 말을 쓸 때도 절대로 반대급부나 어떤 복을 주는 이런 말은 안했을 걸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활속에서 그런 뉘앙스를 받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보시나 베품이나 같은 말이 아니겠는가 새삼 이렇게 생각을 해봅니다.

 

보시에 대해서는 오늘 여기 나오신 우리 형평 이사님들이나 인식개선팀의 여러 선생님들, 사실상 자기 시간과 금전 소비를 하면서까지 엄청난 많은 봉사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새삼스레 이 보시에 대해서 어떻게 중요한가에 대해서는 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럼, 보시를 하면 어떤 결과가 오며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또 어떤 보시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우리 주위에 널려있는 이야기를 짜깁기해서 오늘 이야기삼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보시를 하면서 운명이 사주팔자가 바뀌는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채정승의 이야기가 있는데, 호는 번암(樊巖)으로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그 채제공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채정승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이 어릴 때 조실부모를 해서 외삼촌댁에 기거를 할 때인데 부모가 없이 자랐기 때문에 성격이 포악하고 남을 저주하고 사촌형제 간에도 싸움을 하고 이웃동네에도 말썽을 많이 일으켰지요. 하루는 사랑이 손님이 들었는데 술상을 들고 사랑방에 들어갔습니다. 마침 스님이 한분 와 계셨는데 외삼촌하고 대작을 하면서 스님이 그 아이를 너무 유심히 바라봅니다. 그러더니

“얘가 누구냐?”

고 묻습니다.

“생질이올시다.”

술상을 갖다놓고 얘가 나오려다가 제 얘기를 할 것 같아서 문 앞에서 듣고 있습니다.

“그 애가 상이 참 안 좋은데요.”

“어떻게 안 좋습니까?”

“거지상입니다. 천상 얘를 내보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렇지만 의지할 데 없는 애를 어떻게 내보냅니까?”

“그러면 이 애를 데리고 있으면 이 집도 같이 망할걸요? 아마 이 애가 들어온 이후로 가세가 많이 기울었지요?”

“사실 그렇긴 합니다만, 차마 인정상 내보내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이가 그날 저녁 고민을 합니다.

 

‘내 상이 거지상이라니......’ 도저히 이해도 안 될뿐더러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부모 없이 자라며 이 집에 와서 얻어먹는 것만 해도 거지생활이다.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떠나야 할 것인가?’ 마음이 자꾸 바뀌지요. 이때까지 돌보아준 외삼촌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이제 새삼스레 듭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어차피 거지생활을 할 것 같으면 굳이 이 집에 폐를 끼치면서까지 거지생활을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 집을 몰래 떠납니다.

 

떠나서 그 마을을 다니며 얻어먹고 있으니까 마침 숯 굽는 할아버지가 ‘갈 곳이 없느냐?’합니다. 없다고 하니까 얻어먹을 것이 아니고 숯 굴에 와서 일을 거들어 주면서 같이 있게 되지요. 숯을 구워 팔기 위해서 시장에 갔는데, 시장에서 마침 진짜 거지를 만나게 된 거에요. 애 젖을 빨리는 아주머니인데 얼마나 굶었던지 젖이 안 나와 애는 울고 있고, 아무도 거들떠보지를 않아요. 국밥을 사다가 먹이면서 숯 판 돈을 그 아주머니한테 다 줘버리고 빈 손으로 숯 굴로 돌아갔습니다. 할아버지가 ‘숯 판 돈은 어쨌느냐?’해서 시장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랬더니 그 할아버지가 ‘일한 삯에서 제하겠지만, 그 일은 참 잘했다’고 합니다.

 

그날 저녁에 그 애가 누워 자면서 환희를 맛본 겁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바람직스런 일을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환희를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런 일을 하면 굉장한 희열이 오는구나......’ 하는 걸 새삼스레 느끼면서 그 이후로 이 애는 계속, 숯을 팔면 어려운 이들을 돌보는 일을 몇 년을 계속합니다. 숯 굽는 할아버지가 세상을 버리고 나서 이제 그 숯 굽는 굴을 인수하게 되지요. 많은 양을 시내에 갖다 팔고 이익이 남는 것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얼마나 많이 했던지 그 고을에서는 ‘채도령’이라고 이름을 내게 됩니다. 채도령을 만나면 모든 어려움이 해결될 것이다~

 

이런 봉사를 하면서 그 애의 마음이 계속 바꾸어지는 겁니다. 내가 평생 거지인데 이런 일을 하면서 내 마음이 왜 이렇게 기뻐지는가? 남을 저주했던 마음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고 이웃을 돌봐주려는 진심이 자꾸 생기는 가운데 근 십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 이제는 마음이 상당한 깨달음도 얻게 되었고, 외삼촌이 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외삼촌댁을 방문했습니다. 마침 그 스님이 또 와 계셨어요.

“아니? 이 사람이 왜 이리 상이 바뀌었어?”

상이 바뀌어 있었던 거 에요. 틀림없이 죽음에 이른 사람을 수없이 구해준 모양이구나~ 궁상이 없어지고 오히려 부해지는 상으로 바뀌어 있구나~

“자, 이 애를 이제 글을 가르쳐 보십시오.”

그래서 그 외삼촌이 선생을 들여다가 글을 가르쳐보니 총명했던지 과거에 급제를 하고 정승도 지내면서 세상을 잘 다스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결국 보시를 하고 베품을 함으로써 그 인생의 운이 바뀐다는 것을 제가 이야기를 제가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인도에 썬다싱(Sadhu Sundarsingh)이라는 성자가 있었습니다. 토착종교를 믿다가 후에 기독교로 개종한 분입니다. 이분이 기독교로 개종한 후로 포교를 열심히 했습니다. 티벳트에도 여러 차례 포교활동을 다녔는데, 엄청난 추위가 있던 어느 날에도 티벳에 포교활동을 다녀오는 중에 추위에 쓰러져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일행을 붙들고 ‘이 사람을 구해 돌아가지~’ 합니다. 그러자, ‘이 추운 폭풍우속에서 이 사람을 데리고 가다간 같이 다 죽겠으니 그냥 두고 갑시다~’ ‘그렇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어떻게 두고 가겠느냐? 꼭 구해서 같이 가세~’ ‘꼭 구하려면 혼자 구해 오십시오. 나는 먼저 가겠습니다.’ 그러면서 혼자 그 사람이 떠나버렸습니다.

 

썬다싱은 그 눈보라 속에서 죽을 고생을 하며 마을 어귀에 다달아 보니까 그 먼저 갔던 사람은 그 추위 속에서 동사를 해버렸고, 자기는 업고 오며 서로 체온을 유지하면서 둘 다 결국 살게 된 거에요.

 

이건 아주 유명한 이야기인데, 남을 구하려하면 결국 자기 자신도 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 다음 하나는 또 스님 이야기입니다. 스님이 그 눈보라가 치는 어느 추운 겨울날, 고개 마루를 넘어서 이웃마을로 가고 있습니다. 저쪽 고개에서 넘어오는 거지 하나를 만납니다. 곧장 얼어 죽을듯한 그런 모습입니다. 저대로 두면 얼어 죽겠는데~ 그래서 가던 발길을 멈추고 자기의 외투를 벗어줍니다. 자기 외투를 벗어주면 자기가 힘들 것이나 지금 안 벗어주면 저 사람이 금방 얼어 죽을 것만 같습니다. 엄청난 고민 끝에 외투를 벗어준 것인데 그 걸인은 당연한 듯이 받고는 그냥 가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스님이 기분이 나빠진 거 에요. 나는 엄청난 고민을 하고 벗어준 것인데 저 사람은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구나 싶은 것이죠. 그래서 “여보시오.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는 해야 할 것 아니오?”했더니 그 걸인이 하는 말이, “줬으면 그만이지. 뭘 칭찬을 되돌려받겠다는 것이오?”

 

그래서 그 스님이 무릎을 칩니다.

“아, 내가 아직 공부가 모자라구나. 그렇지, 줬으면 그만인데 무슨 인사를 받으려 했는가. 오히려 내가 공덕을 쌓을 기회를 저 사람이 준 것이니 내가 저 사람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했어야지, 왜 내가 저 사람한테서 인사를 받으려 한 것이냐.”

탄식을 하면서 그 고개를 넘어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봉사를 할 때, 어떤 마음으로 봉사를 할 것인가를 느끼게 해 줍니다. 요새 만 원어치 봉사를 하면서 고아원 앞에서 사진을 찍고 백만 원어치 PR을 한다든지, 그 봉사의 가치를 되받으려 한다든지, 반대급부를 바라고 봉사를 한다든지, 이런 봉사의 개념에서는 정말 맞지 않는 이 스님의 이야기를 우리는 떠올려 봐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보시를 하는데 엄청난 재산이 필요하고 돈이 많이 필요한가? 꼭 돈이 많아야 봉사를 하고 보시를 해야 보시의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러면 돈이 없는 사람은 보시할 자격이 없는 것인가?

 

이런 문제를 이야기하는 중에, 무재칠시(無財七施)라는 말이 있습니다. 재산이 아무것도 없어도 일곱 가지나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죠.

 

그게 뭐냐면, 첫째가 화안시(和顔施)라는 겁니다. 얼굴빛이 환하게 해서 상대를 대할 때 이것도 큰 봉사라는 것이죠. 둘째는 자안시(慈眼施), 눈빛을 편하고 부드럽게 해서 상대를 바라보는 것도 큰 봉사라는 겁니다. 이건 재산이 없어도 되거든요. 그다음에 언사시(言辭施), 말씨를 부드럽게 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크나큰 봉사입니다. 그다음에 심려시(心慮施)라고 하죠. 마음씀씀이입니다. 서로가 마음과 마음을 위로해주는 그런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그다음에 사신시(捨身施)라고 하지요. 결국 몸으로 때우는 겁니다.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걸 보면 좀 들어주고, 얼마든지 몸으로 때울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는 상좌시(床坐施),자리를 양보하는 일입니다. 자리 양보하는 일은 큰 돈 안 들여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마지막으로 방사시(房舍施)입니다. 요즘 와서는 그런 일이 좀 적겠습니다만, 그래도 방을 빌려줄 일이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 나그네가 많이 다닐 때 그 나그네가 집 떠나서 어느 헛간에라도 좀 재워 달라 할 때 방에 재워주는 것, 이것은 정말로 엄청난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일곱가지를 무재칠시라 그럽니다. 재산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입니다. 어찌 보면 아주 쉬운 일입니다. 쉬우면서도 실천해 보려하면 참 어려운 일이 이 무재칠시입니다. 돈이 없이도 할 수 있으면서도 막상 해 보려하면 가장 어려운 일이 이 무재칠시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보시와 베품이 큰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만원 내는 사람이나 일억을 내는 사람이나 그 내는 마음은 똑같다는 얘기입니다. 이래서 재산이 없이도 봉사할 수 있고 있으면 더 좋고, 그래서 숨 막힐 듯 아귀다툼하는 이 사회에서 우리가 보시를 통해 신선한 공기주머니를 터뜨리는 것과 가뭄 후에 오는 소나기의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늘 이 말씀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