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
1862년(철종 13년) 진주농민항쟁은 조선 후기 봉건사회의 모순이 전면화되는 시점에서 농민이 주체적으로 자기 사회의 변혁을 위한 반봉건항쟁이었다.
조선후기 농업생산력이 발전하고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농민층의 분해 가 급속히 이루어졌고 그 결과 소농경영의 영세화와 자영농민층의 몰락을 가져왔다. 여기에 국가의 과도한 조세 수탈과 양반 토호들의 농민들에 대한 부당한 사적 지배가 농민항쟁을 일으킨 객관적 요인들이었다.
진주는 지리산 동쪽에 자리잡은 경상우도에서 가장 큰 읍이다. 땅이 기름지고 토지의 비옥도는 전국에서도 손꼽혀서 벼 한말을 심어 많으면 140두, 적은 해도 80두는 수확할 수 있었다 한다. 특히 조선 제일의 면포 생산지였고 누에치기도 매우 성했다. 규모는 19세기 초 기록에 의하면 70여 개의 면에 걸쳐 15, 671호에 71,808명의 인구가 거주하였다. 토지면적에 있어서도 논밭 모두 합친다면 15,761결 22부 정도였다. 당시 대읍의 기준이 6천 결이었음을 볼 때 진주는 상당히 큰 읍에 속했다. 조선후기 농민항쟁의 지역 경제적 조건이 대체로 좋은 편에 속했음을 미루어 볼 때, 이 진주는 지배계층이 몰려들고 욕심을 드러내는 지역인 만큼 수탈이 심한 곳으로 추정된다.
농민항쟁과 근접한 시기인 1846년 진주 나동리 대장을 보면 <표 1>과 같다.
나동리의 농지 소유 현황
구분 |
가구수(비율) |
전체면적(비율) |
10결 이상 1결 〃 50부 〃 25부 〃 25부 이하 |
1 ( 0.3 ) 21 ( 5.5 ) 37 ( 9.7 ) 83 ( 21.7 ) 240 ( 62.8 ) |
33-91-6(23.3) 30-54-8(21.0) 25-45-0(17.5) 28-90-3(19.9) 26-59-4(18.3) |
계 |
382(100.0) |
145-41-1(100.0) |
*김용섭, 「진주 나동리 대장의 분석」『조선후기농업사 연구』.1970
진주 내동리(奈洞里)에서는 약 6%의 지주가 44% 정도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반면에 63%에 달하는 빈농층은 겨우 18% 정도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어 농지 소유의 분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여기에 농민들을 궁핍하게 한 것은 부세를 이용한 수탈이었다.
특히 진주는 환곡의 문제가 심각하였다. 1861년 새로 부임한 홍병원 목사가 진주목의 환곡 횡령(포흠:逋欠)을 조사한 결과, 전체 환곡 47,386석에서 약 60%에 해당되는 28,649석이 사라져 버렸다. 나머지도 실제로 창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부상 기재되어 있는 액수일 따름이었다. 사라진 액수의 상당량은 전임 수령들과 경저리들이 횡령했던 것이다.
감영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7년간 이자를 받지 않고 운영하고 대신 그 액수를 환곡이 적은 읍으로 옮겨서 수세할 것을 비변사에 건의하였다. 그러나 비변사에서는 환곡의 폐단을 변통해야 한다는 점은 인정하나 28,000여 석이나 되는 양을 감해 줄 수는 없다고 하였다. 결국 그 중 8천 석에 한해서는 받지 않는 것으로 처리하고 나머지 2만석에 대해서는 반드시 거두도록 명령하였다. 수령의 입장에서는 환곡의 부족 분을 어떠한 방법으로든 보충해야 했던 것인데, 당시 가장 손쉬운 방법은 농지에 일정한 세를 부과(결렴:結斂)하는 것이었다.
진주는 환곡의 포흠으로 인해 읍의 재정이 매우 궁색하였고, 1855년에는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 토지에 일정한 세를 부과하였다. 처음에는 1년에 한 차례 거두다가 차츰 빈도가 잦아져서 한 해에도 여러 번 거두어 갔다. 농민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1861년 5월에 목사 신억이 결당 2냥 5전씩 거두려고 하였다. 이에 반발한 진주민들은 류계춘을 중심으로 여론을 일으켜 비변사에 호소하려고 준비하자 목사는 이를 포기했다. 이해 겨울 홍병원 목사가 새로 부임하면서 환곡의 실태를 조사한 후 부족 분을 토지에 일괄 거두는(도결:都結) 계획을 세워 향회를 개최하고 각 면의 수취담당자인 훈장들을 통해 1결당 6냥 5전을 거두게 되자 진주민들은 진주목과 감영에 이것의 부당함을 호소하였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런데다가 우병사 백낙신은 이를 모방하여 향회를 개최하여 병영 재정의 부족 분을 목사와 같은 방법으로 여러 서리들이 횡령한 액수에 해당되는 6만여 냥을 호마다 강제 징수하기로 결정하자(통환:統還) 진주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결국 진주민들은 진주목과 우병영의 이러한 조치를 취소하기 위해 종전과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2. 전개과정 1) 항쟁의 주도 계층 진주농민항쟁이 일어난 1862년(임술년)은 전국 70여 군데의 각 지역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진주농민 항쟁은 이웃 단성현에서 읍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농민 봉기 다음으로 일어났다. 진주민의 항쟁은 도결과 통환을 계기로 일어났지만, 그러한 싸움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초기 도결과 통환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중심 인물은 이명윤(李命允), 류계춘(柳繼春) 이계열(李啓烈) 등이다. 이들의 계급 구성을 보면 각기 사족, 잔반, 농민층을 대표하고 있다. 이명윤(1804∼1863)은 조선의 두 번째 왕인 정종의 열 번째 아들 덕천군(德泉君)의 14세손이었다. 1836년(현종 4)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주로 청직을 맡았다. 철종대 들어와서는 홍문관 부교리, 교리 등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향리에 은거하였다. 그는 전직 조관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도결과 통환이 그에게 부과되자 매우 못마땅하였다. 그러나 이미 중앙권력에서도 소외되었고 향권에서도 멀어진 처지였다. 그가 목사에게 직접 도결에서 제외시켜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이런 이유로 그는 초기 항쟁 논의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참가하였고, 읍회 개최를 지지하였다. 따라서 그의 지위나 명망은 준비활동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 해결의 방법이 합법적인 테두리 내의 등소(等疏)차원에서 철시(撤市)와 같은 보다 적극적인 주장이 제기되자 곧 논의에서 이탈하였고, 이후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다음은 잔반 출신으로 진주 항쟁의 최고 지도자인 류계춘(1815?∼1862)의 인물을 보면, 본래 진주 원당리 출신이었다. 문화류씨(文化柳氏)로 남명의 제자 류종지(柳宗旨)의 9대손이었다. 가문의 위세가 침체되어 신분은 양반이었지만 한 뙈기 땅도 가지지 못한 처지로 당시 사회 모순을 절실히 실감하고 있었다. 당시 잔반들은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거의 상실하였고, 중앙권력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었으며 처지가 농민과 다를 바 없어 새로운 수탈구조 속에서 침탈의 대상으로 전락되었다. 류계춘은 부친 지덕(之德)이 일찍 죽은 후 홀어머니 정씨 밑에서 성장하다가 35세 되던 해(1850) 어머니를 따라 축곡면 내평촌(杻谷面 內坪村)으로 이거하였다. 그가 축곡으로 이거한 때는 환곡 포흠이 매우 심각한 때였다. 그는 환곡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향론을 주도하였고 여러 차례 집회를 열어서 읍과 감영, 그리고 나아가 비변사에까지 등소를 올렸다. 또한 진주 항쟁시 논의를 이끌었고 주변 인물들을 모아서 실질적인 항쟁 준비를 지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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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층을 대표하는 인물은 이계열이었다. 그는 이명윤과 6촌간이라고 하지만 빈한한 농민에 불과하였다. 안핵사로 내려온 박규수가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를‘한 개 거름통을 지고 소를 모는 농사꾼이다. 그 말하는 소리를 들으면 무지 몰각한 어리석은 백성이다’라고 표현하였듯이 한글조차 모르는 무식한 농사꾼이었다. 류계춘이 이 시기 가난한 지식인이라면 그는 순순한 농민이었다. 따라서 그는 초군(樵軍)의 일원이 되었고, 초군 내에서도 나이가 많은 편이어서 좌상이 되었다. 그는 초군 좌상의 지위로서 모의에 참여하게 되었고, 류계춘의 주장에 동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전달하였다. 초군은 농민항쟁의 중요한 핵심 세력이었다. 진주농민항쟁을「초군작변(樵軍作變)」이라고 불리웠던 것은 초군이 대거 참여하였고 중심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초군이란 본래 나무꾼을 지칭한다. 이들은「산에 오르면 나무꾼이요 들에 나가면 농부」라고 하듯이 바로 농민들이었다. 이들이 항쟁에 참여한 계기는 상품경제의 발달과 농민층의 분화 심화 과정 속에서 분출된 빈농층으로서 봉건 지주제와 관의 수탈 체계 속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던 계층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참여세력 중 핵심적이고 가장 과격한 투쟁을 전개했다. |
2) 농민봉기 과정 항쟁 초기의 논의는 박수익 집에서 모임을 가졌고, 1월중 가장 먼저 그리고 여러 차례 이루어졌던 것 같다. 여기서 읍내의 폐단이 논의되었다. 1월 30일에는 산기촌(山岐村)에 사는 사노 검동의 집에서 모의가 있었다. 여기에는 류계춘, 이명윤 그리고 여러 명의 동리 사람이 참석하였다. 이곳에서 다시 도결과 통환을 타파하려는 논의가 있었다. 이명윤은 도회(都會) 장소를 수곡장시(水谷場市)로 정하자고 하면서 류계춘에게 통문을 만들어 발송하라고 권하였다. 류계춘이 관의 처벌을 걱정하자, 이명윤은 자신이 처리해 주겠다고 자신있게 말하였다고 한다. 이날 모임 직후에 이명윤은 인접한 가이곡(加耳谷)에 가서 그곳 사족인 정자약(鄭子若), 정내명(鄭乃明) 등과 이 문제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이들도 도회 개최에 찬성하고, 이명윤이 앞장설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까지의 회의는 등소를 목표로 삼아 읍회를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통문을 발송한 이후 지도부의 계획이 바뀌었다. 즉 한 차원 높은 단계에서 대응이 모색되었다. 2월 1일 통문발송 직후 축곡의 서쪽에 위치한 가서(加西)의 정원팔(鄭元八)과 청암(靑巖)이 강천여(姜千汝) 등이 류계춘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곳 5, 6개 동리에서도 통환을 혁파하기 위해 읍으로 쳐들어 가겠으니 류계춘의 동리에서도 참여하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류계춘은 수곡도회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그 제안을 거절하였고 가서쪽은 여기에 관계없이 결행하였던 것 같다. 결과 이들은 당시 관례를 본다면 오히려 관의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이후 항쟁의 지도부는 관의 대응방법을 보고 방향 전환이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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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박숙연 집의 모임에서 이러한 변화가 드러난다. 이 모임에서 이명윤은 자기와 아무런 상의 없이 철시를 하자는 주장을 담은 통문을 보고 류계춘에게 “나중에 화를 크게 당할 테니 그만 두라”고 한다. 여기에 류계춘은 “오늘이 바로 읍의 장날입니다. 읍내 사람들은 모두 볼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도 내가 죽는 것이고 살아도 내가 사는 것이니 교리 어른에게 무슨 상관이 있어서 이처럼 심하게 꾸짖소”라고 비장한 각오를 하게 된다. ☜ 이명윤사적비(진주시 내평면 내평리) |
항쟁 방식을 강화하려는 시점에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이명윤은 함께 논의가 어려웠고 사족층의 입장에서도 이같은 항쟁 형태에 찬동할 수 없었다. 이후 이명윤은 논의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
항쟁 방향이 전환된 이후 읍회를 대중집회로 확산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고 통문을 돌렸다. 이때 참여한 인물들이 초기 주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유계춘, 이계열을 비롯하여 강승백(姜承白), 강수복(姜守福), 정치회(鄭致會), 정홍팔(鄭弘八)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축곡 동민이었고, 대부분 류계춘의 이웃 내지는 인척 관계이었다. 명단에서 나타나듯이 거의 강씨와 정씨이었는데 류계춘의 어머니가 진양정씨이었고, 강씨의 경우는 강쾌가 이성사촌이었던 점으로 알 수 있다. 2월 6일 수곡 장날 강변에서 읍회가 열렸다. 수곡도회는 읍 전체의 회의였으므로 읍내 각지에서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논의 내용은 농민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도결과 통환의 혁파로 모아졌다. 그러나 해결 방안에서는 두 계열로 나누어 졌다. 대부분 감영에 의송을 보내고 감사가 궁궐을 향해 망궐례(望闕禮)할 때에 길을 막고 호소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류계춘은 이와는 달리 읍에 들어가서 관정에서 시위를 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결국 수곡도회에서는 온건한 방법으로 의송이 채택되어 장진기(張震基), 조학오(趙學五) 등을 대표로 뽑아 감영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읍회 과정에서 류계춘이 계획한「철시」의 주장이 다시 제기되면서 참석자들의 상당한 호응을 받았으며, 나아가 읍폐의 책임자에 대한 훼가 주장이 제기되었다. 농민들이 행동을 옮기기 바로 직전 수청가회의가 열렸다. 수청가는 덕산 내의 한 지역인 듯하다. 덕산 장시가 최초의 공격대상이 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참가한 자들은 초군들이 중심이었고 조직적으로 투쟁 대열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조직적인 강제가 필요하였다. 2월 13일 류계춘은 수곡도회 직후 체포되어 우병영내 진무청에 구금되어 있었다가 집안 제사 구실로 휴가를 얻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2월 14일 회문을 돌려 초군들을 집결시켜 항쟁의 막을 올렸다. 먼저 마동리(馬洞里)와 원당리(元堂里)의 농민들이 수곡장시를 장악하였고, 백곡리(栢谷里)와 금만리(金萬里)의 농민들은 서쪽 변경 지역인 삼장,시천(三壯, 矢川) 등지를 옮겨다니면서 세력을 규합하여 덕천장시를 공격하였다. 서북 쪽에서는 가서리와 청암리가 합세하여 역량을 강화시켜 나가는 전술을 썼다. 최초의 공격 대상 지역인 덕천 장시는 철시와 훼가로서 공격하였다. 장시는 당시 대상인들이 지방권력과 결탁하여 향촌의 상권을 장악하여 이득을 취한데 대한 공격이었고, 훼가는 이곳 훈장 이윤서(李允瑞)의 집부터 시작하였다. 그가 진주목에서 도결을 결정할 때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기세를 올리며 읍치로 향하였다. 덕천 강변을 따라 여러 면리를 거치면서 그곳 부호를 공격하는가 한편 농민들을 규합하였다. 2월 17일 농민들이 읍치에 도착하기 직전 감영에서 통환을 혁파한다는 공문을 발송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은 의례적인 감영의 태도임을 알고 흔들리지 않고 예정된 시위를 감행해 나갔다. 2월 18일 진주성 서쪽 5리 지점에 집결하였다. 이때 목사는 두려움에 질려 직접 협상에 나서지 못하고 영향력 있는 사족 이명윤에게 농민들과 접촉하도록 부탁하였다. 농민들은 이명윤에게 대신 도결 철폐를 보장하는 완문을 요구하였고 그는 다시 목사에게 이를 권하여 완문을 얻어내어 농민에게 전달하였다. 완문을 얻어낸 농민들은 진주목에서 시위를 마치고 병영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2월 19일 아침 농민군은 읍내 대안리에 있는 객사 앞 장터에서 집회를 가졌다. 이때 병사는 농민들의 기세에 눌려 이들의 불만을 해소시키려는 목적으로 환곡 횡령 서리 김희순(金希淳)을 즉석에서 처형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은 이런 병사의 태도에 더 격분하여 관리와 서리에 대한 공격이 표면화되었고 본래 목표대로 통환 철폐의 공문을 받아 내었다. 읍내 공격을 마치고 난 후 외촌으로 항쟁을 확대시켜 나갔다. 2월 20일 오후 농민들은 앞으로의 활동에 대하여 토론을 벌이고 대오를 정비하여 지역에 따라 농민들을 분담하여 외촌으로 나서서 23일까지 약 22개 면을 지나면서 56채의 집을 부수고 40채의 집에서 재물을 압수하였다. 공격을 받은 자는 주로 대상인, 지주 등이었다. 이때의 농민군 활동 양상은 전체적으로 알 수 없고 다만 동남쪽으로 진출한 부대의 활동만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소촌.대여촌. 개천리(召村, 代如村, 介川里) 등을 거치면서 소촌역. 옥천사(召村驛, 玉泉寺) 그리고 평소에 악명 높은 토호가 등을 공격하였다. 대여촌 남성동 양반 성석주(成奭柱)와 개천리의 생원 최운(崔澐)은 공격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양반이자 부호로서 권세와 부를 이용하여 농민들을 괴롭혔으므로 평소에 원성이 높았다. 따라서 농민들로서는 첫째가는 공격대상이었다. 나흘동안 봉건지주에 대한 공격을 끝내고 23일 밤 8시경, 농민들은 일단 해산하였다. 2월 14일부터 시작되어 약 열흘간에 걸친 항쟁 과정에 훼파되거나 불탄 집은 모두 126호였으며, 재산·전곡 등을 빼앗긴 집은 78호인데 액수는 모두 10만 냥에 달했다고 한다. 3. 봉건정부의 대책 진주농민 항쟁에 대해 경상우병사 백낙신은 2월 21일, 24일, 29일 세 차례에 걸쳐 정부에 보고하였다. 정부는 사태가 이전의 농민항쟁과는 달리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조치를 취하였다. 먼저 서리들의 횡령에 대해 합법적인 등소를 하지않고 무력봉기했다고 해서 농민들의 행위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이를 사전에 막지 못한 수령의 책임을 물어 진주목사 홍병원, 경상우병사 백낙신, 전임 경상감사 김세균을 파직하고, 박규수를 안핵사로 파견하여 봉기의 주동자 및 부정 서리의 처벌과 개혁방안 강구를 지시했다. 조사내용은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부정과 경상 우병영과 진주목의 환곡 실태, 서리들의 횡령, 진주목사 홍병원은 환곡의 부족분을 농민에게 전가시키고, 전 관리들의 부정을 은폐하려 하였다. 박규수는 농민항쟁의 원인을 환곡의 문란에 있었음을 파악하고 그 개혁을 위해 별도의 특별기구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정부는 5월 26일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삼정의 개혁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리고 항쟁을 주도한 류계춘, 김수만, 이귀재에 대해 사형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박규수는 영남 사림 세력과 미묘한 갈등과 안핵 사업의 지연과 주동자에 대한 가벼운 처벌로 농민항쟁이 경상도 전역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며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말았다. 봉건정부는 농민 봉기에 대해서 단호한 처벌을 해나가지만 농민항쟁은 확산되어 나갔다. 이에 봉건정부는 강경진압, 형식적인 선무 작업만으로는 치유가 힘들다고 인식하면서 자체 논의를 거듭한 끝에 8월 19일 「삼정이정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삼정이정책 자체는 원칙에 대한 천명이었고 이의 구체적인 시행을 강제하는 후속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당시 봉건사회의 기본 모순인 토지소유관계를 둘러싼 갈등에 있었음을 감안할 때 이 같은 개혁안은 문제점의 부분적인 해결에 만 관심이 두어진 것이었다. 또한 이 삼정이정책은 지배층의 이해관계에 따라 실시가 유보되다가 10월 29일부터 다시 본래의 제도로 환원되었다. 이처럼 봉건정부는 체제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자 봉기 과정에서 제기된 농민들의 의견을 수렴할 것처럼 모색하다가, 수습 국면에 들어서자 이를 철회하여 재차 농민을 기만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듬해 6월에는 전 경상우병사 백낙신과 전라감사 김시연을 비롯한 처벌한 수령들을 거의 방면함으로써 봉건국가의 대응책의 허구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4. 역사적 의의 진주농민항쟁은 1862년 전국 70여 군데에서 발발한 농민항쟁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여 우리나라 근대 민중운동의 서막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농민항쟁은 봉건적인 지주제하의 지주와 작인간의 대립을 기저로하여 농민층의 분화를 반영한 부농과 빈농의 대립이 상존하고 있었다. 여기에 국가의 과도한 조세수탈과 사대부·토호들의 불법적인 향촌지배 문제가 그 원인이었다. 초기의 등소운동과 준비과정에서는 각기 다른 계층적 입장이기는 하지만 양반·요호부민이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빈농을 핵심으로 한 농민들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항쟁이 고양되면서 빈농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빈농들이 지향하고 있던 사회변혁의 방향은 궁극적으로 농민적 토지소유의 실현이었지만 봉건정부는 봉건적 토지모순의 구조인 지주-전호제을 접어두고 조세의 부분적 개선책인 삼정이정책을 통해 그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던 것이다. 진주농민항쟁은 많은 교훈을 남기게 되었다. 1월에 여러 차례 은밀한 모의가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2월 읍회, 초군회의, 열흘간의 뜨거운 항쟁, 그리고 진영의 포졸들이 들어오면서 피해 다니던 나날, 난민으로 지목되어 잡혀가는 농민의 모습, 5월 30일 이른 아침 병영 남문 밖 뜰에서 류계춘, 김수만, 이귀재가 효수되고, 이서배들의 보복이 있었다. 안핵사, 선무사, 암행어사가 빈번히 다녀가도 농민들의 아픈 마음을 대변해 주진 못했다. 그것은 수탈의 잠정적인 후퇴일 뿐이었다. 이러한 진주농민항쟁은 농민운동을 한 차원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것은 항쟁지도부의 역량에 의한 치밀한 계획과 지도에 의해 초군 및 대중 선동작업의 끊임없는 노력이 눈부시다. 그러나 그 한계점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농민들의 의식이 봉건사회의 모순을 군현 단위의 권력 부도덕성에서만 찾으려는 점과 또한 군현 내의 국지적 투쟁으로 지역을 초월한 전국 단위의 조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읍내와 외촌의 공격을 마치고 난 다음의 활동이 미비함으로 인해 봉건정부의 기만적인 술책과 탄압에 의해 저지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러한 국지적이고 일회적인 고립 분산 투쟁도 동학농민운동에 가서는 전국 단위의 조직으로 연결되어 그 한계성을 극복하게 된다. 2000년 9월 임재식(생초고 교사)
<참고문헌> 1. 망원 한국사 연구실, 1862년 농민항쟁, 동녘, 1988 2. 송찬섭, 1862년 진주농민항쟁의 조직과 활동, 『한국사론』21, 1989 3. 晋州市史 4. 임재식, 1862년 진주농민항쟁, 역사교육 13, 전국역사교사모임, 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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