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홍의 소프트 파워] 영혼이 흘리는 땀 | 기사입력 2009-06-27 00:10
[중앙일보 정진홍] # 경남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는 표충비(表忠碑)가 서 있다. 1738년 영조 14년에 건립된 높이 3.9m, 폭 97㎝, 두께 70㎝의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큰 공을 세우고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전란 수습에 기여한 사명대사의 충정을 기린 비다. 흔히 '사명대사비'라고도 불리는 이 비는 국가적인 대사가 있기 전후에 땀을 흘린다고 해서 화제다. 1950년 6월에도 서 말 여덟 되나 되는 땀을 흘린 후 이내 6·25전쟁이 터졌다고 한다. 비단 그때만이 아니라 1910년 경술국치, 1919년 3·1운동, 그리고 1945년 8·15 해방과 1960년 4·19 및 1961년 5·16 전후로도 표충비가 땀을 흘렸다고 한다.
# 표충비가 국가적인 대사가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주장에 대해 과학계는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부경대 환경대기학과 변희룡 교수는 “표충비의 땀은 고온다습한 바람이 찬 비석에 닿아 표면에 이슬이 맺히는 '결로(結露)' 현상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을 내놨다. 특히 표충비를 만드는 데 쓰인 휘록암은 쉽게 차가워지는 성질이 있어 고온다습한 바람이 불어오면 다른 암석보다 이슬이 잘 맺힌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표충비를 지켜봐온 사람들은 표충비의 땀을 단순히 결로현상으로 규정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표충비는 가장 습한 장마철에조차 습기가 하나도 배어 있지 않다가도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는 어김없이 땀을 흘린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에게 표충비의 땀은 사명대사의 충절 어린 '영혼이 흘리는 땀'이다.
# 지난 23일 존엄사 논란의 한복판에 있는 김모 할머니가 달고 있던 인공호흡기를 떼어낸 직후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병원 측에서는 무의식 상태의 조건반사적인 일이지 결코 의식과 감정이 매개된 눈물이 아니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 눈물 한 방울은 존엄사 판결을 내린 법원도, 이제까지 생명 연장의 노력을 해왔다는 병원도, 존엄사의 권리를 되찾겠다던 가족들도 모두 꾸짖는 할머니의 '영혼이 흘리는 땀'이었다.
# 생명은 법적인 잣대로 재단되고, 의학적인 소견으로 대체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생명은 그것이 설사 내 것이라도 자기 임의로 처분할 수 없다. 생명은 영혼의 몸부림이다. 김 할머니의 눈물은 무의식적인 생체의 조건반사적 반응이기에 앞서 살고자 하는 영혼의 몸부림이 자아낸 진하디진한 땀이다. 누구도 생명을 예단할 수 없다. 누구도 그 영혼의 몸부림으로서의 생명을 임의로 처분할 수 없다. 생명의 가치는 곧 영혼의 가치다. 생명에 무게가 있다면 그것은 곧 영혼의 몸부림의 무게다.
# 지난 25일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골목상가를 2시간여 누볐다. 구멍가게, 찹쌀 도넛가게 등을 들러 과일노점상을 만나고 영세 상인들과 서민들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이느라 땀깨나 흘렸다. 하지만 그것은 '몸이 흘리는 땀'이었다. 지금 대통령에게 절실한 것은 '영혼이 흘리는 땀'이다. 몸이 흘리는 땀은 식으면 찝찌름한 소금기만 남는다. 하지만 영혼이 흘리는 땀은 남다른 향기를 머금고 퍼져 나간다.
# 요즘 대통령이 맘에 든다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그만큼 대통령이 욕을 많이 먹는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왜 그런 건지 똑 떨어지는 이유 역시 발견하기 쉽지 않다. 어쩌면 대통령이 욕을 먹고 외면당하는 진짜 큰 이유는 그에게서 영혼의 향기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대통령은 영혼의 몸부림을 강화해야 한다. 중도를 이야기하는 것도 좋고 실용을 말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 중도와 실용에 영혼이 담기지 않으면 대통령은 계속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결국 중도와 실용이 진정한 생명력과 추동력을 얻기 위해서도 대통령은 기꺼이 영혼이 흘리는 땀을 진하게 뿌려야 한다.
정진홍 논설위원
출처-중앙일보
[넋두리]
언젠가 가까운 친척이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하고 계실 때였다.
가까운 분들과의 마지막 인사를 하고나면
호흡기를 떼기로 되어 있었다.
사실 핏줄로서 그런 결정을 내리기엔 내 몸의 동맥줄이 끊어지는 아픔이지만
전혀 가망성없다는 판정을 받고는 그 끝없는 세월을
병원에서 모실 수 있는 경제력이 없었던 가족들은
그렇게 아픔속에서 하루라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또한 그 주어진 짧은 시간에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갔었는데
중환자실에서 만나뵙고 끓어오르는 마음으로 손을 주물러 드렸다.
아...
그 때 나는 영혼이 흘리는 눈물을 보고야 말았다.
의학적으로는 이미 뇌사상태였는데 그분은 나를 보고 우셨던 것이다.
같이 울다가 돌아선 나의 마음은
무엇이 옳은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없었다.
분명히 그분의 의식이 살아 있었음을 난 알 수 있었기에.
그러나 의학적으로는 의식도 없고 숨도 자발적으로 못쉬는 사람.....
눈물을 닦아드리며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나와서
그 이야기를 그분의 아들한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세상을 떠나가셨다.
돈이 무엇인지...생명이 무엇인지...
자식이 그렇게 누워있다면 부모는 그렇게 보내지 않을텐데...
생명이란 무엇일까?
영혼의 몸부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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