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나의 뿌리

우리 할아버지 행장

여경(汝梗) 2005. 6. 29. 17:47


추봉선생 행장(秋峰先生 行狀)


  君의 휘(諱)는 승우(勝愚)이니 초명은 형우(亨祐)요 자(字)는 경진(敬眞)이다.
일찍이 선사(先師) 시암 선생(是菴 先生)을 모시고 심중의 뜻을 “일실(一室)에 봄바람
감돌아 도서(圖書)가 적막(寂寞)하고 천봉(千峰)에 가을비 내리니 바다독기(海?) 소멸다.”
라고 하여 스승으로부터 허여(許與)하는 칭찬을 들으니 그로 인하여 추봉(秋峰)이라 자호하였다.


   꼐?南氏)의 본관은 의령이니 신라 영의공(英毅公) 휘 민(敏)이 성씨 시조이고
고려 의령군(宜寧郡) 휘 군보(君甫)가 본관 시조이며 국조(國朝) 영의정 충경공(忠景公) 휘
재(在)가 저명한 선조이다.

   五傳하여 휘 진(振)은 재종숙 추강(秋江) 문청공(文淸公)에게 글을 배웠고 학자들이
추계(秋溪)선생이라 일컬었다.


   연산군의 사화를 피하여 삼가(三嘉) 두심동(杜尋洞)에 은둔하였으니 금계서원(錦溪書院)
에서 향사한다. 자손들이 유지를 준수하여 벼슬을 구하지 않고 대대로 유업(儒業)을 계승하
였다.

   회복암(悔伏菴) 휘 이일(以一)은 君의 고조(高祖)요 락헌(樂軒) 휘 한모(漢模)는 증조
(曾祖)이며 반고(磐皐) 휘 영희(永熙)와 묵와(묵窩) 휘 상봉(相鳳)은 조(祖)와 고(考)이다.
母는 초계정씨 삼규(三圭)의 女이니 서정 옥윤(西亭 玉潤)의 후손이다.



君은 고종(高宗) 임진년(壬辰年) 5월 23일 안산리(案山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
여 공부를 배움에 잘 깨닫고 문득 외우더니 독서를 게을리 아니하여 원대한 기상이 있었다.


글을 읽거나 쓸 때 말소리와 행동이 단정하여 그림 같았다. 선생이 유심히 지켜보고 그
그릇됨을 알아보고는  대인공과 혼인을 약속하고는 손녀를 君에게 시집보냈다.
君은 당시 14세로 학관에 머물면서 공부를 배웠다.

  처음 대학(大學)을 배울 때 스스로 잠심 완색(潛心玩索)하여 의심을 제거하고 문답한 내용
을 기록하여 반복하고 참고하면서 오묘한 뜻을 구하였다. 선생은 그 사려의 침착함을 가상
히 여기면서도 강직하고 특출한 기상을 염려하여 때때로 경계시켰다.


  君이 깊이 반성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매진하더니 약관(弱冠)의 나이에 사서오경(四書五經)
을 끝마쳤다. 경서의 뜻을 논함에 왕왕 언외의 취지를 제기하여 누차 선생의 그윽한 미소담
긴 칭찬을 들었다.

  당시 동문중에는 뛰어난 선비들이 많았지만 치밀한 공부로는 거의 앞서는 이가 없었다.
갑인년(甲寅年) 선생을 모시고 왜인에게 항거하여 문묘를 수호하니 생도들이 사방에서 모여
들어 학사가 모두 수용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몇몇 동지와 함께 학생을 나누어 지도하면서 매일 밤 의문을 제기하며 둘러앉아 토론하고
스승께 나아가 정정하여 강학의 규범을 신장시켰다.

  틈틈이 선생의 종손 우영(宇榮)으로 더불어 송사(宋史)에 남으로 천도한 이후의 변란과
충신 의사들의 절개의 자취를 각각 장단시로 읊고 책으로 엮어서는 남송영웅루(南宋英雄淚)
라 제목하여 시대를 상심하는 심정을 펼쳤다.



  이보다 앞서 대인공이 물계(勿溪)협동(挾洞)구목촌(九木村)으로 집을 옮겼으니 군이 매양
문안하면서 때때로 농산 정장(農山 鄭丈)에게 나아가 경전의 뜻을 질문하였다. 농산공은
그 학문의 깊은 진전을 인정하고 기대함이 매우 두터웠기에 군이 역(易)을 읽는다는 소문을
듣고 편지를 보내 조급함을 경계했다.


  君은 역(易)의 양(陽)을 북돋우고 음(陰)을 억제한다는 것과 춘추의 왕실을 높이고 오랑캐
를 물리친다는 것은 그 의미가 동일하니 지금의 학자들이 마땅히 먼저 알아야 할 것이라는
뜻으로 시를 올려 후의에 감사하였다.

  얼마 후 농산공이 세상을 떠나니 정씨집안의 제공이 군에게 물계정(勿溪亭)에 거처하면서
자제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였다.


  君이 학문의 미흡함과 사문을 오랫동안 떠나야 한다는 점으로 난색을 표하니 선생께서 사
설(師說)을 주면서 격려하였다. 군은 비록 헤어져 지내며 강학하였으나 안부전화와 문목이
달마다 연이었고 글짓는 조리는 자뭇 작자의 규범을 터득하였다.

  선생은 글짓는 말예(末藝)에 빠질까 염려하여 본원(本原)의 공부에 힘쓰라고 면려하더니
예의문목을 보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禮에 정립함이 이와 같으니 거의 다른 기예에 미혹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오년(戊午年) 대인공의 상을 당해 슬픔으로 지탱하지 못할 것 같았으나 예를 지킴은 더
욱 근면했다. 상을 지내는 여가로 한천(寒泉)의 고사를 따라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
다. 기미년 만세운동 때는 물계동이 최대로 활약하여 왜인의 질시를 받았는데 군의 백공(伯
公)이 주범이라는 지목을 받아 집에 있지 못하고 피신하였다.


  君이 홀로 여막을 지키는데 저들의 사찰이 가혹하여 강학을 할 수 없게 되자 군이 깊이 울
분하였다. 상을 마치고 대량 장자곡에 은거하니 무릉과 고개 하나 사이로 사문에 문안하기
편하였고 또 정율계(鄭栗溪) 기(琦)와 산을 나누어 거처하여 글 읽는 소리가 서로 들렸다.
대량(大良)에 유풍이 크게 일어나 생도가 날마다 많아지자 산간에 서실을 지어 가산(稼山)이
라 편액하였으니 대개 추강의 농사일을 배운다는 유지를 추모한 것이다.



  몇 년 살다가 무곡(茂谷)으로 이사갔는데 마을 사람들은 글에 관한 것이 생기면 대소를 가
리지 않고 모두 청했고 배우는 이들이 원근에서 전부 모여 들었으니 군이 좌우로 응수하여
각각 원하는 바를 들어주었다.

  이에 사람들이 공경하고 신복하지 않음이 없어 여자와 아이들도 모두 추봉이 후덕한 군자
임을 알았다.


  무진년(戊辰年)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군은 백건(白巾)과 삼띠를 하고 상사를 다스렸다.
상을 마치고 급문동지로 더불어 유문을 수집 교감하여 간행하였으며 또 행장을 기록하여 지
덕자의 상고할 자료로 남겼다.

  병자년(丙子年) 대부인의 상을 당해 슬픔과 집례를 한결같이 전상과 같이 하였다. 전후상
이 모두 왜인의 법망에 구속되어 장사의 예를 다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더니 다시 좋은
자리를 잡아 성대한 예를 행하여 심정을 풀었다.



  신사년(辛巳年) 나와 더불어 김동강(金東江) 영한(寧漢)에게 선생의 갈명(碣銘)을 청하고
인하여 서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평양에 도착하여 기자능을 참배하고 장편시를 지어 존모(尊慕)의 뜻을 부쳤으며 아울러 기
자가 동쪽으로 오지 않았다는 세인들의 망설을 변명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선양(瀋陽)을 지
나면서 삼학사(三學士)의 충혼을 조문하였고 서안에 이르러 내 아우 재현(再鉉)의 농장을 방
문했다.


  광야가 하늘에 접하고 사방은 끝이 없는지라 흉중이 상쾌하여 홀연 관영(管寧)이 요동으
로 피신한 생각이 일어났다. 풍토를 두루 살펴보니 기름진 땅은 흡족했으나 누추한 오랑캐
풍속이 형편없고 또 왜로(倭虜)가 점거하여 기세등등 하였다.

  이에 한숨쉬며 탄식하기를 “어느 곳이나 저들의 구속을 벗어날 수 없다면 어찌 부모의 나
라를 떠날 필요가 있겠느냐” 하고 드디어 낙심하여 돌아왔다.



  태암산(泰巖山) 서쪽 물가에 정자를 지어 은둔처로 삼고 주자의 시어를 취하여 암서(巖栖)
라 이름하였다.

  기둥에 사연구(四聯句)를 걸어 이르기를 “고산유수에 누구의 집인가 명월청풍이 나의 벗
이로세 시서예악 익히며 공맹정주(孔孟程朱) 배우리<高山流水誰家 明月淸風故人 講習詩書禮
樂 願學孔孟程朱>”라고 하였으니 이는 은둔하여 걱정하지 않고 죽음으로 선도(善道)를 지키
려는 굳은 의지이다.

  을유년(乙酉年) 광복소식을 듣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술잔을 가득 채워 당기면서 시 한
수를 읊었으니 구한문물의 성대함을 다시 보듯 하였다.



  성균관 주관(主管)이라 자칭하는 이가 선철(先哲)의 위폐를 폐지하고 향사 예절을 제멋대
로 고치며 각 군의 향교 토지를 몰수 재단에 편입하여 신학교의 경비로 삼아 향사(享祀)의
비용을 충당치 못하게 하였다.

  이에 분개하여 글로써 그 무지하며 망령된 작태를 규탄하고 각 군 사림에게 저들의 지휘
를 따르지 말고 예전의 봉향(奉享)을 지키라고 국중에 포고하였다. 인하여 종족(宗族)으로
더불어 문안을 마련하고 계를 만들어 선조 재사(齋舍)를 수리하고 제수를 풍성히 하였으며
세보(世譜)를 편찬하고 친목을 강론하여 흩어진 인심을 수습하였다.


  경자년(更子年)에 불행히도 次子 기종(基種)의 참화를 당하여 비록 도리를 쫓아 자제하였
으나 자신도 모르게 신기(神氣)가 꺽이고 풍질(風疾)이 발작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정신을 진작시켜 독서를 그치지 않고 깊은 뜻을 궁구하여 심중에 묵연(?然)
히 깨달음이 있었다. 밤이 되어도 등불을 밝히게 하여 일어나 초기(抄記) 하였으니 대개 은
연중 해는 저물고 갈 길이 멀다는 탄식이 있어 호흡이 붙어있는 한 그 뜻에 조금도 태만함
을 용납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갑진년(甲辰年) 2월 25일 술시(戌時) 암서서실(巖栖書室)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3세였
다. 한달장으로 장지(莊池)골 뒷산 임좌원에 장사하였으니 원근 사우중 만사(輓詞)를 드리
고 상여줄을 잡아 곡한 이가 매우 많았다.

  이씨의 본관은 강양으로 곧 선생의 손녀이니 래헌 원칠(萊軒 源七)이 그 부친이다. 2남2녀
를 두었으니 남은 기훈(基勳) 기종(基種)이요 최효준(崔孝準) 권순표(權淳杓)는 사위이다.
내외손은 총 약간명이다.


  君은 중후한 자질과 총명한 자질로 일찍 선사(先師)의 문에 올라 학문하는 절도를 들었다
그 뜻을 원대하게 세우고 공부를 세밀히 하여 성철(聖哲)의 가르침을 체득하였으며
성명(性命)의 정수(精髓)를 탐구하였다.

  도의 근원이 하늘에서 나오며 그것이 나에게 부여되었음을 명확히 알았기에 나의 공부가
근면하지 않거나 잠시라도 해이해짐을 두려워하였다.


  敬으로써 마음을 지키고 誠으로써 정(情)을 단속하여 시서(詩書)의 참뜻을 음미하며 중화
(中和)의 덕을 함양하였다. 배양함이 이미 두터웠지만 그 두터움을 더욱 구했고 연마함이 이
미 돈독했으나 그 돈독함에 더욱 힘?㎢?.


  넉넉하다는 생각이 전혀 없이 항상 부족하다 여겼으며 밤낮으로 열심히 하다가 죽은 후에
야 그만두었으니 그 조예의 높고 깊음은 참으로 쉽게 헤아릴 수 없었다.

  거동에 나타난 위의(威儀)는 모습이 공손하고 안색이 온화하며 시선이 단정하고 말씨는 신
중하였다. 성품이 너그러워 아무리 급한 순간일지라도 사나운 말을 하거나 안색을 바꾸지 않
았고 사소한 일에도 반드시 신중히 말하기를 “일에는 大小가 있어도 이치에는 大小가 없
다”고 하였다.



  부모를 섬김에는 순종하여 뜻을 봉양하였으며 곁을 떠나 유학할 때는 음성이 없어도 들었
고 모습이 없어도 보았다.

  항상 가르침을 어길까 기대를 저버릴까 염려하여 잡시도 태만하지 않았으며 과감히 선을
행하고 도를 구해 일신을 정립하였으니 효도의 시종을 다했다. 백공(伯公)과는 우애 있어 잠
자리를 함께하며 떨어지기를 원치 않았고 재앙이 닥쳐 남북으로 헤어지자 그리는 정이 간절
하였다.


  얼마간의 농토가 생기면 반을 나누어 형에게 드렸으며 같은 마을에 살면서 항시 즐거워하
였다. 예로써 집안을 바로잡아 화목으로 다스렸으며 의로써 자식을 가르쳐 사랑으로 보살폈
다. 벗들이 매우 많아 항상 집안에 가득하였으니 학문으로 모인 것을 즐거워하여 대접의 어
려움을 잊었다.


  사물을 처리하고 중인을 포용하는 도량이 있어 청탁에 휩쓸리지 않았다. 사론의 분열과 사
림의 몰락을 깊이 경계하여 장벽을 부수고 사방으로 통하는 큰 길에 우뚝섰으며 국중의 명사
와 교류가 넓었다.

경전을 논함에 자기와 같다하여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와 다르다하여 성내지 않았다.


  말하기를 “천하의 도리(道理)는 다함이 없고 인지(仁智)의 견해는 각각 다르다. 사람들
의 지견(지견)에 이론처(異論處)가 있으면 궁구하여 요체를 체득하라.

  만약 의논이 같지 아니하여 성난 눈으로 노려보고 분쟁이 이어진다면 어찌 선비로써 학문
하는 도리이겠는가. 가령 주장하는 것이 모두 옳다하여도 객기로 덤빈다면 마음 다스리는 공
부가 없어 구이(口耳)의 보잘것없는 소득을 면치 못하리리 무엇이 귀하겠는가” 하였다.


  마음을 논할 때는 理다 氣다 하는 편견을 버리고 주재자(主宰者)는 理요 운용자(運用者)
는 氣라는 것으로 설명했다. 태극을 논할 때는 “이것이 이치의 별호이니 理의 정상(情狀)
을 안다면 태극의 정상(情狀)을 알 것이다” 하였다.

  역을 읽을 때는 본의(本義)를 주로 하였으며 선사(先師)의 명으로 교변역일부(交變易一部)
를 정리하여 열람하기에 편하게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유현(儒賢)들이 주자를 본받지 않음이 없으나 우암(尤菴)이
그 의리의 종지(宗旨)를 체득했고 퇴계가 학문의 정수를 체득했다.”하였다. 매양 퇴계집을
즐겨 읽더니 도산서원을 방문하여 생전의 유적을 두루 보고 원무(院?)와 누대(樓臺)의 편액
을 노래하여 경모하는 정성을 표하였다.

  천성으로 산수를 좋아하여 가야. 두류. 금산 등 여러 산의 계곡을 답습하고 봉우리에 올랐
으며 시를 읊고 글을 지어 산림의 풍경을 묘사하고 답답한 회포를 펼쳤다. 평소에 반드시 일
찍 일어나 의관을 단정히 하고 정신을 집중 정좌하여 새벽기운으로 심신을 보양하였다.
때로는 정원을 거닐면서 화초를 가꾸었으니 한가한 중에도 또한 일거리가 있었다.



  집안이 대대로 가난하였지만 유업(儒業)을 닦았기 때문에 서적이 자뭇 많았다. 누차 이사
를 다녔으나 근실히 수호하여 분실함이 없었고 훼손된 것이 있으면 수선하여 완비하였다.

  선인의 글 중 남아있는 것은 비록 한 조각이라도 수록하고 두루마리를 만들어 간직하였
다. 추계실기(秋溪實記)를 정리하여 제족(諸族)에게 반포하고 전세(傳世)의 보물로 삼게 했
으며 다른 집의 문고(文稿) 또한 정리하고 엮어서 전하게 하였다.


  양력이 사용되고 하력(夏曆)이 폐지됨을 개탄하더니 상중하 원갑자 (上中下 元甲子) 역서
(曆書)를 만들어 책상에 얹어놓고 날짜를 가름하였다.

  오랑캐의 풍습이 범람하고 예속이 무너짐을 근심하여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요약 사례이지
록(四禮易知錄)을 만들어서 제자들로 하여금 간행하게 하였다. 무릇 사람들의 행동 하나 예
절 하나라도 윤상(倫常)에 유관한 것은 반드시 드러내고 칭찬하여 퇴폐한 속습을 경계했다.

  배우려는 이가 찾아오면 현우를 가리지 않고 모두 진실한 마음으로 지도하여 피로도 늙음
도 느끼지 못했다. 이는 고군이 혹 불어나고 일맥이 혹 전해지기를 바랜 것이니 그 마음의
고충을 짐작할 수 있다.



  아!  君은 박문약례(博文約禮)와 체용(體用)을 갖춘 학문으로 격변하는 시대를 만나 산림
에 은둔하여 세상과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랑캐의 습속이 세상을 바꾸고 道가 소멸함을 항상 근심하였기에 언어 문자간에
나타난 것은 단 하나도 이를 강조하고 탄식한 뜻이 아님이 없었다. 그러나 세상이 그와 어긋
나 마침내 쓰이지 않는 공허한 말이 되어 버렸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는가.


  한유(韓愈)가 말하기를 “시세에 어긋난 것이 하늘과 통한다” 하였으니 대개 그와 더불
어 어긋난 것은 시세이며 더불어 통한 것은 하늘이요 더불지 않은 이는 今人이며 더불어 같
이 한 이는 古人이기에 다시 무엇을 슬퍼하겠는가.


  기훈(基勳)이가 남긴 글의 흩어짐을 염려하여 외당숙(外堂叔) 세영(世榮)에게 부탁하고 여
러 선비들과 도모하여 문집을 간행하고자 하더니 나에게 행장(行狀)을 구하였다.
아! 나와 秋峰은 어려서부터 사문(師門)에서 만나 학문에 뜻을 같이하여 서로 격려하였고 세
상에서 병을 함게 얻어 서로 목숨을 의지하였더니 이제는 끝인가 보다.

  지난날을 회상해보니 쓸쓸하고 울적하여 말로써 표현할 길이 없으매 이에 이목(耳目)으로
보고 들은 것을 간략히 기록하고 심중의 감회를 끝머리에 붙여 입언자(立言者)의 공정한 평
가를 기다린다.


단기 4300년 江陽 李永鉉


우리 할아버지의 행장이다....

비록 기자에게 참배하셨지만...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1350629수욜 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