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했던 직장/도산 안창호와 흥사단 이념

도산안창호의 이상촌건설운동과 시사점(남상오) 3

여경(汝梗) 2015. 6. 2. 17:59

. 이상촌의 건설계획과 실천활동

 

본 연구에서는 도산의 이상촌 건설의 첫출발이라 할 수 있는 봉밀산개척사업과 국민대표회의 이후 본격적인 이상촌운동의 추진 과정, 그리고 1935년 대전감옥에서 가출옥후 평양근교를 중심한 이상촌건설을 추진한 사례를 조사하였다.

 

3.1 이상촌건설 계획의 첫출발-봉밀산 개척사업

 

안창호는 미주의 공립협회 동지들과 국내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일이 시급함을 깨닫고 19071월 이강, 임준기 등과 함께 미주 리버사이드에서 대한인신민회를 조직한 다음 동경을 거쳐 국내로 들어와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를 만들어 미주 공립협회간 연대를 이루었다.(이명화; 2000, p.124)  190912월경 안중근의사의 이등박문 처단 의거의 살해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체포됐다 무혐의로 풀려난 안창호와 신민회 회원들은 국내 구구운동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후 19103월 긴급간부회의를 열어 독립전쟁의 전략을 채택하고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기회가 올 때에 독립전쟁에 대비할 것과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창설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국내에는 서울 전덕기, 평양 안태국, 평북 이승훈, 황해도 김구가 남아 독립군기지개척사업을 지원하고, 국외에는 미주 안창호, 연해주 이동녕, 북간도 이동휘, 서간도 이회영이시영최석하, 북경 조성환, 페테르스부르그 이갑 등이 지역을 분담하여 각지에서 기지개척사업을 담당하기로 했다. 당시 신민회의 기지개척 대상지는 장백산 부근으로 상정되었다. 대상지역이 선정되면 자금을 모아 토지를 구입하고 국내에서 계획적으로 이주민을 모집하여 집단적으로 이주시켜 한인촌을 건설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와 교회 등 문화시설을 설치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창설한다는 계획이었다.(이명화; 2000, p.129)

 

3.1.1 도산의 역할

 

안창호는 19104월 해외망명 길에 오른 뒤 7월경 독일의 조차지였던 중국 청도에서 이갑, 유동열, 김지간, 김희선, 신채호 등 독립지사들과 만나 이른바 청도회담을 개최하여 만주지역에 농지를 개척하자는 논의를 재론했으나 회담과정에서 유동열과 김희선이 신문과 잡지경영을 하자는 견해를 보여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 


안창호는 회담을 끝내고 본격적인 기지개척 후보지를 선정하기 위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것이 1910828일경이었다. 안창호는 한달후인 9월에 신민회 회원들과 다시 회담을 열고 의연히 농지개척에 주력하여 교민한족의 생활안정을 얻으며 독립운동의 투사를 양성함이 한족의 미래운동에 유조할 것을 역설하였다. 회담은 많은 논란 끝에 최종적으로 만주의 길림성 밀산현에 농토를 매수하여 토지개간사업을 일으키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애국운동의 중심지를 만들고, 계획의 추진을 위해 군사교관, 일반과학교수 및 농사전문가를 초빙할 것 등을 합의하였다


안창호는 니콜리스크, 스라우야니카 등 러시아 여러 곳을 다니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동포들의 단결과 애국심을 호소했다. 그리고 재러, 재만 한인 유력 인사들과 미주에서 파견되어 와 있는 동지들을 만나 기지개척사업을 의논하였고 191127일 안정근, 장경과 함께 밀산현 봉밀산 개척지를 돌아보았다.

 

3.1.2 봉밀산개척지 개요

 

안창호와 미주공립협회, 신민회 회원들에 의해 기지개척 적임지로 부각된 곳이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지대인 길림성 밀산부내의 봉밀산지역이었다. 봉밀산은 러시아 항카호 가까이에 위치한 곳이다. 무렌강을 따라 러시아 부락인 뚜리로그에서 28베르스따 떨어져 있다. 이곳은 북만주와 러시아의 국경지대이며, 영토상으로는 중국령이지만 정치적, 경제적으로는 러시아에 속한 곳이다. 그리고 일제의 세력이 미치지 않으면서 러시아와와 교역이 가능한 곳이며, 지리적으로 만주와 러시아의 한인들이 쉽게 집중될 수 있는 지역이다. 이 때문에 재만한인사회와 재러한인사회를 연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무엇보다도 넓은 평원으로 비옥한 토질을 갖고 있어 농업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하지만 자금을 대기로 했던 이종호가 지방색의 감정에 휩쓸려 출자를 거부함으로써 좌절되고 만다. 이에 도산은 크게 낙심하고 울었으며 그가 평생에 이때처럼 상심하고 낙담한 일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블라디보스톡에서 한일합방 소식을 들으며 그가 정력을 기울였던 대성학교, 청년학우회등은 무산돼 버렸고, 독립근거지를 만들려던 계획도 유산되고 말았으니 그의 심경은 가히 동족간의 모략과 중상, 파쟁을 보고 겪으며 민족사업을 영위함에 있어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민족의 성격을 개조하는 일이 시급함을 절감하였다. 도산은 재기를 벼르며 도미여비가 주선되기까지 북중국을 두루 시찰했고 1911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이명화, 도산안창호의 이상촌운동에 관한 연구, p168)

 

3.1.3 태동실업주식회사 설립

 

신민회의 독립군기지설치와 독립군 창건에 대한 논의를 안창호로부터 전달받은 미주공립협회는 19081021일 아세아실업주식회사 창립을 발기하고 자본금을 2만불로 정한 후 매주 25불씩 총 8백주를 발행하여 자본을 모으는데, 자본총액의 10분의 1이 되면 개업하기로 했다. 아세아실업주식회사는 한인들 최초의 투자회사로서 본사를 블라디보스톡에 두고 미국, 하와이, 국내에 지점을 두기로 했다. 아세아실업주식회사는 이후 190931일에 태동실업주식회사로 승계되었다. 북미 대한인국민회의 한 조직으로 만들어진 태동실업주식회사는 자본금 총액을 5만불로 정하고 매주 50불씩 1천주로 모집하여 시베리아지방에 독립운동기지를 설정하기 위한 주금(株金)을 모금했다. 이렇게 마련된 투자자금은 봉밀산지역 토지구입과 농기구 마련비용에 쓰여졌다.


봉밀산의 토지는 국민회 총회장인 정재관이 태동주식회사의 대리인이었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이자 원동지역 전권위원으로 파견된 이상설은 원동임야주식회사의 대리인으로서 공동 구입했다.(이명화; 2000, p.132) 당시 구입된 토지의 면적이 어느 정도인지 상세하게 알 수는 없으나 30여 팍지(1팍지는 32일경)라는 설2,430에이커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191061일 무렵 회사직원수가 54명이고 2,095달러의 자본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1.4 봉밀산개척지의 규모

 

봉밀산 개척지는 19117월경에 토지 등기를 마쳤다. 개간한 경전에 파종을 끝내고 18간의 사무건물과 35호의 인가를 건축했다. 이렇게 토지를 매입한 후 이주자들을 위한 가옥을 건설하고 길을 닦았다. 식량과 의복을 확보하고 농사를 짓기 위한 우마, 농기구 등을 구입하여 농업경영을 위한 제반준비를 갖춰나갔다. 토지개간을 위한 이주자들의 식량대급금과 우마, 농기구 마련비용은 태동주식회사의 투자자금과 중국인들에게 빌린 부채로 이루어졌다.(이명화; 2000, p.133) 


당시 기지개척자금을 투자하기로 약속한 이종호가 자금을 대기로 한 약속을 번복하였으므로 부족한 자금은 중국인들에게 빌려 메꾸었다. 이렇게 하여 개척된 봉밀산에는 150여호, 100, 50호가 모여있는 3곳의 한인부락이 형성되었다. 이 외에 산재해 있는 한인호수만 해도 약 200호 가량된 것을 합하면 총 500호 정도가 이주했는데, 1호에 4-5인으로 계상하면 봉밀산에는 약 2천명 내지 25백명 정도가 이주한 것으로 나타났다.(이명화; 2000, p.134)

 

3.1.5 소결

 

봉밀산의 개척사업은 국민회의 정식 투자사업으로 진행되었지만 자금의 절대부족과 계속되는 흉년, 이주한인들이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는 등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결국은 투자된 자금조차도 회수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결국 계속적인 투자가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미주 한인사회와 재러 한인사회가 연계하여 독립운동기지로 개척하고자 했던 안창호와 대한인국민회의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3.2 국민대표회의 이후 이상촌운동의 추진

 

도산이 혼신을 다하여 준비하고 개최하였던 국민대표회의가 별 성과없이 결렬되자 독립운동계는 침체에 빠졌다. 하지만 안창호는 자신이 구상한 이상촌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토지구입을 위한 실지 답사활동을 개시했다. 도산은 북경 부근의 서산일대를 돌아보며 이상촌 후보지를 물색한 다음 19241월 초순에 북만주로 가서 흥사단원인 박병일을 대동하고 산해관, 금주, 설개도 등지를 답사했다. 도산은 남경, 북경, 천진, 만주 등 중국의 남북방 각지를 답사하고 유력한 이상촌 후보지로 돌아본 것은 남경과 진강 사이에 하촉일대였다. 하촉은 멀리 양자강이 내다 보이는 나지막한 야산으로 계곡에는 기름진 전답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앞서 독일의 부락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우물을 파서 저수탑을 세우고 자가 발전기를 설치하여 수도와 전기시설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도산은 이 지역을 이상촌 건설의 적지로 여겼다. 도산은 자신이 직접 답사하기도 했지만 기지 물색을 위해 흥사단원을 각지에 파견하기도 했는데, 남양과 광동방면을 돌아본 후 필리핀, 보르네오, 싱가폴까지 다녀온 임득순, 이탁 등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도산의 개척사업은 자주 출몰하는 마적들의 등쌀과 만주 일대 군벌간의 전쟁 등 중국내의 정치사회적 혼란상황이 기지구축을 허용하지 않았다.(이명화; 2000, p.153)


도산은 19241122일에 상해를 출발하여 1221일에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입성하였다. 도산은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이 될 만한 세력을 갖지 못했고 재외 한민족이 통일되지 못한 조건과 경제력으로도 독립운동이 불가하다고 한탄하면서 중국 동부지역에 모범촌을 설치하여 인재와 재력을 준비해야 할 것임을 장래사업으로 밝혔다. 즉 모범촌에서 인재를 양성하고 실업기관을 조직한다는 내용은 바로 이상촌 건설의 계획을 말한 것으로, 실업은 독립전쟁 준비에 필요한 군기, 군제, 군량, 건설비, 외교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며, 인재양성은 독립군, 장관, 정치가, 공학과, 의원, 실업가, 학술가들, 즉 독립전쟁 수행에 필요한 모든 인력을 조달하고자 했다.


도산은 미주 여러 곳을 다니면서 새로운 도시개발 상황도 관찰했다. 특히 몰몬교의 본산인 유타주의 솔트레이크시를 자세히 답사했다. 도산은 이곳의 가로수 종류와 도로배치, 주택의 모형, 건축재료 등 까지도 상세히 관찰했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은 이상촌 혹은 독립운동 근거지를 설치하는데 참고될 자료를 얻고 식견을 넓히고자 했던 것이다.

 

3.2.1 만주농촌개발운동의 전개

 

도산은 1925516일 다시 상해로 귀환후 북경을 시작으로 유일독립당 결성을 위한 통일운동을 전개하는 가운데에서도 여러 지역을 답사하여 이상촌건설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했다. 도산은 흥사단에서 모금한 3천여원의 자금을 들여 진강부근의 중국인 소유 토지를 차입하였고 이곳에 한인들을 이주시켜 모범촌을 건설하여 벼농사를 짓고자 했다.


도산은 1926년 만주지역의 민생안정책을 위해 1927년에 설립되는 농민호조사의 준비단계라 할 수 있는 농민조합과 농업공사를 설립했다. 만주 동포들에게 농업공사의 주식을 공모하여 그 자금을 기초로 전농민의 증산의욕을 강화하여 생계를 안정시키고 약진하는 경제개발력을 활용하여 군정활동에 공헌하기로 결의한다는 취지를 내세우고 길림성 액목현강에 토지 일천구지를 매수하여 개간코자 했다. 이후 도산은 동경성과 경박호 일대를 답사하며 이상촌 기지건설을 위한 토지탐사를 계속했다. 조사결과 이상촌 건설지 후보지로 가장 유력시한 곳은 양자강 연안의 진강과 길림지역이었다.


3.2.2 농민호조사의 조직

 

도산은 생활난에 빠진 한인들의 구제가 심각한 문제임을 깨닫고 192741일에 길림성 대동공사내에서 협동조합적 성격을 가진 농민호조사를 결성하였다. 농민호조사는 각 사원들의 출자금과 저축금을 기금으로 토지를 매수하여 신농촌을 건설하고 출자액에 기준하여 성과금을 분배하는 일종의 주식회사이다. 농민호조사의 사원은 토지를 매수하고 신농촌을 건설하기 위헤 150원 이상을 출자하여 토지를 매수하고 출자액에 따라 분배하며, 150원 이상을 출자할 수 없는 사원은 토지매수저축금으로 5년간 매년 30원씩 출자하게 하고 저축금을 합하여 토지매수가 가능할 때는 토지를 우선 매수하고 후에 입금 되는대로 계속 매수하여 각 사원 출자액에 따라 분배하도록 규정했다. 그리고 30원 이상 저축하기 불가능한 사원은 농민호조사에서 토지조차를 주선한 후 거기 소요된 금액을 계산하여 각각 분담하여 출자하도록 했다.

 

3.2.3 소결


국민대표회의 결렬후 도산은 이상촌건설에 더욱 힘썼고 흥사단을 통한 토지구입비용 마련과 협동조합방식인 농민호조사를 성공리에 결성시키는 등 그가 평생 이루고자 했던 이상촌건설운동이 비적떼들의 소란과 방해 등 중국의 어지러운 정세로 인해 기지개척과 농업경영의 사업 착수는 점차 지연되었다. 게다가 19324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의거가 일어난 날, 일제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면서 도산의 국내 귀환으로 해외 이상촌건설운동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3.3 평양근교의 이상촌건설

 

도산은 대전감옥에서 3년간 복역하고 출옥한 1935년부터 평생숙원인 이상촌의 건립을 실현할 의도로 향리 가까운 곳에 정착한 후 우선 자기의 주거에서부터 이상적인 농촌주택의 모형을 설정하여 시범을 보이고자 송태산장을 건립하게 된다.

 

3.3.1 모범주택-송태산장의 건립

 

옛 선인의 수도장이었다는 유서깊은 송태는 평양에서 13정도의 강서군 대보면에 위치한 풍경이 좋은 곳이었다. 송태산장은 도산이 스스로 설계하였다. 한국가옥의 특징과 기본을 보전하여 살리고 통행에는 비를 맞지 않도록 부엌과 변소와 거실을 연결했으며, 주부의 노고를 덜도록 고려된 부엌과 지하실의 구조며 위생적인 변소, 통풍, 채광, 그리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을 사용한 건축자재와 특별한 기술을 요하지 않는 일반적 시공방법을 택하여 건축비용을 절감하도록 설계하였다.

송태산장 한쪽으로는 유현한 산속의 맛이 나도록 면해져 있어 위치도 퍽 아늑하였고 산밑으로는 평양벌과 멀리 서해에 이르는 연봉들을 전망할 수 있었다. 서벽사라고 명명된 이 집은 그가 체포될 때 까지 머물러 춘원, 김병연 등 많은 동지들이 찾아와 조국의 장래문제를 토론하는 등 민족주의자들의 메카가 되기도 하였다.(이순형; 1975, p.11)

 

3.3.2 1호 이상촌-달마부락 건립추진

 

도산은 장차 국내의 여러 곳에 이상촌을 세울 계획으로, 우선 농촌근대화의 핵심인재를 양성할 직업학교의 설립을 중점으로 하는 이상촌설계를 구상하였다. 이 학교에서 연마된 인격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각 지역사회에 돌아가 핵심적인 인물이 될 때 피폐한 농촌사회를 변혁, 부강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해외에서의 이상촌과 그 성격이 다른 것이며, 민족중흥의 기초를 다지는데 있어서 실업과 교육을 연결시키려한 점이 특징이다. 어떤 점에서 국민고등학교를 통한 덴마아크의 부흥을 가져온 그룬트비히를 연상하게 하며, 유달영도 도산은 말년에 덴마아크에 큰 흥미를 가지고 구국의 길을 덴마아크의 역사에서 찾고자 했다고 설명하면서 그가 강서군 송태에서 이 운동을 실현해 보고자 분투한 것은 과연 도산다운 일이라고 말했다. 도산의 국내 제1호 이상촌의 후보지는 평남선 강선역에서 북쪽으로 보이는 달마산 아래 지역으로, 입지적으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산 밑 남향으로는 대동강에 이르는 넓은 벌이고 수륙교통이 좋아 물산을 처리하기에 편리한 곳이다.


이상촌의 개념은 도산 안창호가 이야기한 것을 제자인 춘원 이광수가 지은 도산안창호평전에다 정리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강과 산이 있고 토지가 비옥하며 교통이 편리한 입지적 조건을 가질 것

200호 정도의 규모로, 집단적인 농촌부락을 건설할 것

이상촌은 도시규모의 도로망과 상하수도 등의 시설을 갖출 것

주택의 건축양식은 한국건축의 특징과 전통미를 살리면서 위생, 경제, 미관 등을 합 리적으로 고려하고 전체적인 도시상은 다양한 개성으로 조화시킬 것

공공시설로는 공회당, 금융기관, 협동조합, 운동장, 학교, 우체국, 병워느 여관, 세면 장, 활판사, 장의소, 공원 및 각종의 공동시설을 포함할 것

공회당에는 집회실, 오락실, 담화실, 도서실, 부락사무소 등을 설치하여 미족정신훈 련에 비중을 두고 집단생활과 사회훈련을 생활화할 것

금융기관과 협동조합은 저금과 융자 및 생산물의 공동판매와 생활용품을 공동으로 구입하는 역할을 감당할 것

운동장에는 아동유희장을 부설하고 각종의 과학적인 체육활동을 함으로 체력을 강 장케 하고 모험적 정신을 함양할 것

공동시설에는 각종의 농업에 관련된 생산시설과 농산물의 처리시설 및 농기구수리

소 등을 포함할 것

특히 학교는 일반학교는 물론이고 직업학교를 설치하여 농, , , 도예, 목축, 공 업 등의 교육과정을 두어서 전, , 채소원, 뽕밭, 과수원, 조림의 실습을 주로 하여 공업부문에서는 농업건축, 농업토목, 요업, 식료품가공, 농구제조, 목공, 철공 및 농 촌상업을 교육할 것

 

당시 선천의 신성학교 교장이었던 장리욱에 의하면, 조만식이 송태산장을 방문했을 때 셋이서 같이 걸어 내려오면서 도산은 직접 그 일대를 가리키며 어느 지역에는 특수직업학교가 건립되고 일반주택지역은 어느 곳에 위치한다는 등의 계획구상을 소상히 설명하는 등 구체적인 이상촌의 배치에 관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최윤호가 특수직업학교의 교육계획을 도산에게 제출하자 도산은 구체적인 계획의 착수를 위해서 장리욱을 일본으로 보내 특수직업학교와 같은 훈련기관을 유의해서 참고자료를 조사해 오도록 지시했는데, 1936년에 그가 일본 각지를 시찰하고 우유산업, 양돈조합, 온실경영, 가내공업장 등은 국내에 적용이 가능하고 특히 원예작물로 고소득을 누리는 것을 보면서 한국의 농촌도 부흥시킬 수 있음을 보고하였다.

 

3.3.3 소결

 

도산은 향리에 내려와 직업교육과 훈련을 핵심으로 구상한 직업학교의 적용을 이상촌건설운동에 담아 추진하였지만 1937년 동우회사건으로 체포돼 재수감되면서 이와 같은 계획이 중단되고, 결국 1938년 도산이 별세하면서 이상촌건설의 뜻을 실현하지 못하게 된다



-출처 : 흥사단 충북지부 부설 '충북도산아카데미연구원'에서 2015 상반기 세미나 발제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