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했던 직장/도산 안창호와 흥사단 이념

도산안창호의 이상촌건설운동과 시사점(남상오) 1

여경(汝梗) 2015. 6. 2.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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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는 말

3.2.3 소결

. 이상촌운동의 배경 및 성격

3.3 평양근교의 이상촌건설

2.1 재정확보기지개척의 상호보완적 접근

3.3.1 모범주택-송태산장의 건립

2.2 강산개조론적 배경

3.3.2 1호 이상촌-달마부락 건립추진

2.3 이상촌건설운동의 성격

3.3.3 소결

. 이상촌의 건설계획과 실천활동

. 시사점

3.1 이상촌운동의 첫출발-봉밀산 개척사업

4.1 “민족독립전쟁 수행성격

3.1.1 도산의 역할

4.2 “자치정신, 풀뿌리민주주의 원형제시

3.1.2 봉밀산개척지 개요

4.3 “국내도시개발개념 최초 시사

3.1.3 태동실업주식회사 설립

4.4 “한민족 정통성과 주체성보전 성격

3.1.4 봉밀산개척지의 규모

4.5 “국민경제적 발전단계 시사

3.1.5 소결

4.6 사회교육문화적 측면

3.2 국민대표회의 이후 이상촌운동의 추진

4.7 주거복지선각자적 측면

3.2.1 만주농촌개발운동의 전개

4.8 도산의 교훈

3.2.2 농민호조사의 조직

. 나가며


. 들어가는 말

 

한국민족운동사의 선각자중 한 사람이 도산 안창호선생(1878-1938)이다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7리 대동강 하구 도롱섬에서 농업을 하는 안흥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안창호는 그의 나이 17세 때 조국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을 보면서, 어찌하여 우리나라에 청국과 일본군이 들어와 전쟁을 하는가를 고민하였다


동지들과 토론을 통해 도산은 외국이 마음대로 우리 강토에 들어와서 설레는 것은 우리나라가 힘이 없는 까닭이다라는 결론을 얻고 조국과 민족의 발전에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결심하게 된다. 


22세에 미국 땅을 밟은 도산은 이후 중국, 만주, 러시아, 동남아시아로, 조국으로 구국운동을 위한 긴 여정이 이어진다. 그 도정에서 흥사단을 조직하여 무실역행, 충의용감을 강조했던 도산이 평생을 통해 추구했던 일중 하나가 이상촌건설이었다. 실천을 존중하고 규범의 위력을 믿는 도산은 흥사단의 정신을 구현할 이상촌 건설을 준비하기 시작한 시기는 1925, 도산이 임시정부의 직임을 사퇴하고 남경에 와서 동명학원을 창설할 무렵이었다. 기미 만세운동 이후로 수백 수천의 청년 남녀가 속속 본국을 탈출하여 해외로 나왔고, 도산은 이들 한국의 젊은 남녀들이 국혼을 상실하지 않고 모국의 문화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재외 한족의 정신적, 문화적 중심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도산은 평소 물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말하였거니와, 특수한 성현, 지사층은 몰라도 일반 대중은 제 재물 있는 곳에 항상 마음이 끌리는 것이니, 가령 무슨 회를 조직할 경우에도 거기 거액의 입회금을 내고 정기적으로 의무금도 내어서 그 회에 제 재물이 들었을 때에 비로소 그 단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고 그 단체가 망하여서는 안된다 하는 생각이 간절하여져서, 이것이 망하지 아니하고 잘 되도록 힘 쓸 생각이 나는 것이라고 도산은 생각했다. 이 심리는 재외 한족의 중심도시건설에도 당연히 고려되었다. 가령 진강에 한족의 중심도시를 건설한다 하면 될 수 있는 대로 다수 동포의 출자로 토지를 사고 가옥을 건축하고 생산기관, 금융기관까지도 만들어야만 비로소 도시가 재외 동포의 정신적 중심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도산은 평생 동안 지켜나갔던 그의 사업원리, 점진적으로 민중의 자각을 기다려서 하는 것”, “민중 자신 속에서 지도자를 발견하고 그로 하여금 민심을 결합케 하고 결코 도산 자신이 지도자의 자리에 서지 아니하는 것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이상촌건설을 구상하고 국내에서는 근대적 농업경영을 주로 하는, 사회 기능이 고루 조화된 이상적인 모범농촌을, 해외에서는 독립준비를 위한 전략기지적 성격을 가지는 모범촌 건설을 전개하였다.(최현복; 1986, p.12)


한편 도산은 이상촌건설을 통해 유랑하는 재외한인의 정신적, 문화적 구심과 독립운동의 기지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안으로는 국내의 근대적 농업경영의 근거지로서의 모범촌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도산이 구상한 이상촌이야말로 우리나라의 미래를 열어갈 젊은이를 훈련시키는 도량이었으며, 조국의 운명을 짊어질 젊은이들에게 경제적 능력을 구비하게 하는 인재양성기관이기도 했다. 국가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교육받고 훈련받는 직업기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이상촌의 가장 근본적이고 중심적인 계획이념이었다. 그러나 이상촌건설을 위한 도산의 꿈은 혼란했던 해방공간의 정국 속에서 좌절되지만, 도산이 추구했던 이상촌의 정신-집은 단순히 사람들이 머무르는 거처가 아니라 시민을 양성하는 시민교육의 터전이며 만민개업의 목표를 달성하는 직업훈련의 도량은 아직도 찬연히 빛나고 있다.(정창무; 2006, p.140)


본 연구에서는 한국민족운동사에서 그다지 밝혀지지 않았고 낯설기까지 한 도산 안창호선생의 이상촌건설운동에 대한 의미와 실체에 대하여 알아보고 그 시사점을 도출하고자 한다.


-출처 : 흥사단 충북지부 부설 '충북도산아카데미연구원'에서 2015 상반기 세미나 발제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