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했던 직장/형평운동

형평운동 유적지 답사 2

여경(汝梗) 2009. 7. 3. 13:53

(이어서)

망진산(망경산) 봉수대 앞마당에 세워져 있는 신현수선생 송공비입니다.

교육으로 민족해방을 꿈꾼 선생을 위해 펜촉의 모양으로 만든 기념비입니다.

 초기에 처음 만들었던 비석을 안고 있습니다.

 송덕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功孰爲大(공숙위대)   紛沌見識(유돈견식)
朝作暮學(조작모학)   勞心竭力(로심갈력)
川中女男(천중여남)   日進明域(일진명역)
中口成碑(중구성비)   銘詩鐫刻(명시전각)

망경초등학교와 진주시내를 내려다 보며

생전에 다 바쳐 꿈꾸신 뜻이 온전하게 이뤄져가는 진주를 지켜보십시오..... 

 형평사의 이름을 제안하신 신현수선생님.

민중계몽과 국민교육을 통해 민족해방을 꿈꾸신 선생께서는

백정 속에 부자가 많다는 소문을 듣고 교육기관 설립에 필요한 기부금 모금을 위해

강상호 선생을 방문, 민족전선의 급선무로 백정계급의 해방이라는 결론하에

결사와 명칭을 생각해내셨다 합니다.

"우리는 수평(水平)보다 한층 의미깊은, 저울같이 공정하고 평등을 주장한다는 의미로

형평(衡平)이라 하는 것이 좋겠다"

 여름날이지만 밤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답사 마지막 장소, 강상호 선생의 묘소 앞입니다.

너무 어두워서 제대로 사진을 찍지 못하여

다음 답사 때 새로 사진을 찍기로 합니다.

 

형평운동가 강상호.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이름이 있을까요?

 밝은 날이 아니라 대충 디카를 찍다가 구도가 잡힌 사진만 올립니다.

그런데 어떤 게 어떤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음에 재답사를 통해 사진과 글을 다시 수정해 올리겠습니다.

 

예상하기로는

이 비석은 강상호 선생의 어머니의 덕을 기리며 세운 송덕비입니다.

만석꾼 집안의 안주인은 당시 세금을 못내는 동리 사람들을 위해

대신 세금도 내어주시고 그 외 많은 덕을 베푸셨고

그 덕을 입은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워드렸는데

세월이 좀 흐르고나서 아드님이신 강상호 선생의 묘소앞으로 옮겨 세웠다 합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 하나요.

좋은 교육을 몸소 실천하시는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신 백촌선생의 삶을 보며

수신제가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게 됩니다.

 사진 오른쪽 네모난 비석에 백촌강상호...라는 글자가 보입니다.

선생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잘 모르니

다음에 꼭 사진을 바르게 찍어 올리겠습니다. 

어둠이 짙게 내린 속에서

우리는 백촌 강상호 선생의 삶에 대해 듣습니다.

1936년 6월 이후의 기록이 없으며, 해방 후에는 삼일운동 동지회 회장으로 활동하셨지만

좌익으로부터도 우익으로부터도 이용가치있는 인물로 표적이 되어

그 이름과 삶에 상처를 많이 입으셨지요.

 

형평장(축산기업조합장)으로 장례식을 치뤘는데

저 오죽광장에서부터 이곳까지 만장 행렬이 줄을 섰다고 하니

당시 얼마나 인망을 받으신 분인지 가늠이 됩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한 배우게 됩니다.

가문의 영광인 국립묘지 이전의 뜻을 접으시고

진주사람들과 함께 계실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강인수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진주사람 강상호선생]의 묘소를 지켜낸 뜻있는 분들의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선생께서 잠들어 계신 이곳에

대한민국의 인권운동 [형평운동]의 역사를 기념하는 형평역사공원을 설 날이 빨리 왔으면 합니다. 

세시간 반의 대장정을 이끌어 주신, 형평역사팀장 신진균 이사님^^*

정말 고생많으셨습니다.

감사드려요^^

 

[형평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 올리는 자료를 작업하며

개인블로그에도 동시에 올림을 밝힙니다.

저작권은 형평운동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