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형평운동과 강상호선생
조선시대 가장 천한 계급으로 멸시받았던 백정이 인간 평등과 차별 철폐를 내걸고 싸웠던 운동입니다. 형평사를 한자말을 풀이하면 저울 형, 공평할 평,단체 사입니다. 풀어보면, '저울(衡)처럼 공평(平)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 단체(社)'입니다.
1923년 경남 진주에서 만들어진 형평사는 이후 전국의 조직으로 확대되어 당시 일제가 가장 주목하는 사회운동단체가 되었습니다. 강상호 선생은 신현수 선생 등과 함께 '형평사' 결성을 주도했습니다.
진주군 대안면장을 지낸 천석꾼의 아들로 태어난 백촌 강상호 선생은 양반 집안의 후손으로 백정신분해방을 위해 앞장 서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강상호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1919년 3월18일부터 3만 명의 군중을 모아 일제타도를 외치는 만세운동을 전개해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생의 후반기에는 자식들의 학교교육도 제대로 못시킬 정도로 가난에 시달리다가 1957년 진주군 일반성면의 시골집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생을 형평운동에 헌신한 댓가는 가산의 탕진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1957년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진주의 백정들은 선생의 거룩한 뜻을 기리며 형평장(당시 축산기업조합장)으로 장례를 치렀고 당시 장례행렬은 진주시내에서 새벼리 석류공원까지 이어질 정도로 많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선생의 땅에 묻혔지만, 가난 때문에 선생의 묘지마저 남의 땅이 되었고,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자 후손들은 국립묘지로 이장하고자 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기념사업회가 나서서 강상호 선생의 묘소를 진주에 그대로 두자고 제안하였고, 진주시에 청원해 방치되었던 묘소에 표지판이 서고 진입로가 만들어졌습니다.